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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31. 2023

하이데거와 실존주의

"너 사상이 뭐냐고"

"실존...주의?" (영화 <변호인>)



실존주의야말로 철학계의 아이돌이다.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실제로 아이돌 행세를 했으니, 다른 증거가 또 필요할까? 이해가 될듯 말듯하면서 왠지 멋져 보이는 것이 매력 포인트다.


나는 철학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연히도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그 대답에 가장 가까이 간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하필 또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실존철학이라면, 실존철학은 참 쉬운 학문이다. 내 석사 논문은 사르트르 철학을 해석 도구로 쓰고 있다. 싸워야 하는 상황이고, 두 개의 무기가 주어졌다. 하나는 허접하지만 그냥 탄창 넣고 쏘면 되는 총이다. 다른 하나는 인류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신박한 무기인데, 직접 원리를 깨치고 조립해야 쓸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내게 하이데거는 두 번째 무기와 같은 것이었다. 두근거리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무기 대신에, 나는 이해하기 쉬운 무기를 집어들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많은 철학자들은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이해(understand)하는 대신 오해(misunderstand)했다고 말한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사람이, 하이데거라는 독일 사람 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 자신의 철학을 만든 것이다.


실존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보통 알베르 카뮈를 든다. 또 프랑스 사람이다. 카뮈가 표현한 것은 아마도 사르트르의 철학일 것이다. 사르트르 본인도 <벽> 같은 소설로 자신의 철학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잘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냥 사람을 부르는 편이 낫다.


카프카는 어떤가? 카프카가 표현한 것이 실존의 문제인지, 삶의 부조리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대 사회의 부조리인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 모든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카프카의 위대함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명쾌함이 문제라고 대답하고 싶다. 철학이 꼭 어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꼰대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철학이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한 모색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대답을 내주고 있으니,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논리철학논고>로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마저도 나중에 자아비판을 들고 되돌아왔다.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은 기투성(thrown-ness)이다. 기투성은 현존재(Dasein)의 핵심 속성이다. 현존재는 말 그대로 현존재다.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Dasein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책을 만났다. Dasein이 실재가 아니라 지향이라고 한다. 배배꼬아 말하자면, Dasein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일종의 이데아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하이데거를 아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삶은  짐이 되었는가


읽은 책은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이데거에 관해 다른 사람이 쓴 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철학사전류의 책에서 언급되는 정도만 본 듯하다. 몇 개월 전에 현대 문명의 이기에 관한 다양한 시각들 중 하나로 하이데거를 소개하는 구절을 접하고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내게 하이데거는 아직도 신선하다. 나는 하이데거를 잘 모른다.


하이데거를 읽은 것은 대학생 때였다. 여자친구와 함께 겨울 방학 동안 <존재와 시간>을 읽기로 한 것이다. 번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책이다보니 영어판을 택했다. 독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신비로운 시간이었다. 후설의 제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후설의 제자답게, 지옥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독해였다. 용어 정리하는 데만 수백 페이지가 흘러간다. 당연하다. 현상학이란, 다름 아닌 용어를 정리하겠다는 학문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언어를, 실제 세계와 나란히 해보겠다는 대담한 계획이다. 언어철학과는 다르다. 언어철학은 언어를 보지만, 현상학은 세계를 본다. 아니,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메커니즘을 본다.


박찬국 교수의 책에서 본 내용을 통틀어, 공감 가는 내용은 딱 하나, 즉 하이데거 철학이 노자 철학과 비슷하다는 감상이다. 나는 <존재의 시간>이 <도덕경>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리스식 건축을 찬양하는 하이데거의 모습이 바큇살 사이의 공간을 칭찬하는 노자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책의 나머지에 대한 감상은, 마치 사르트르를 읽은 것 같다. Dasein에 대한 해석을 보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인 것은 물론이다.


여기, 망치 하나 추가요


에필로그


쓰고 나니, 욕 먹기 딱 좋은 글이다. 나는 하이데거는 물론이고 후설도 잘 모른다. 잘 모르지만 왠지 멋지게 보이는 하이데거 철학을 좋아하는 나야말로 아이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광팬이다. 와우(WOW)를 플레이할 당시, 내 캐릭터들 중에는 이런 이름들이 있었다. Epoche, Dasein, Eidos...


누군가가 그 아이디를 보고 내게 물었다. "툼레이더 좋아하시나 봐요?" 생각해보니, 툼레이더를 만든 게임회사 이름이 에이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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