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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Sep 01. 2023

하이데거가 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을 읽고]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하이데거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말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글을 썼다. 독일인의 피를 위해 돌격하라는 글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적당한 글감으로 현대 문명 비판을 집어들어도 이상할 것 없다. 자칭 하이데거빠인 나지만, 이런 주제는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내게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존재자들을 관리하고 조직하고 지배하고 향유하는 데 빠져서 존재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이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쪽)


그래, 하이데거라고 이 정도 비판을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하이데거가 무려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존재자들의 성스러움을 경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16쪽)


적어도 이건 내가 아는 하이데거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나아간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서양의 전통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전통철학에서 철학은 시보다는 과학에 더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7쪽)


두 번째 문장은 나도 동의하지만, 첫 번째 문장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하이데거의 철학이야말로 그 어떤 철학보다 과학에 가깝다. 적어도 <존재와 시간>은 그렇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환생?


하이데거는 시적인 태도란 사물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고, 이러한 태도에서야말로 사물들은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드러낸다고 이야기합니다. (20쪽)


시적인 태도로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해답이라는 얘기다. 이쯤 되면, 하이데거는 칸트의 환생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소위 '시적인 태도'로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모습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말하는 숭고미를 통한 신으로의 귀의와 별로 달라보이지 않아서다.


하이데거가 인격신을 명백히 배제하고 있다(70쪽)고는 해도, 그가 말하는 '근본기분'은 칸트가 말하는 숭고체험과 꽤나 겹쳐 보이는 개념이다. 


칸트의 철학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잘 나가다가 결론이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존재 이유가 "도덕적 인간"의 완성에 있다는 것이 3대 비판서의 결론이다. 물자체와 현상계를 분리한 것은 천재적인 발상이었으나, 칸트는 올바른 질문을 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해답까지 제시하려는 오만을 거부하지 못했다.


칸트가 제시한 두 가지 숭고 체험, 즉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에 불안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학적 숭고와 연관 짓기가 쉽기는 하다.) 그러나 칸트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숭고 체험에서 배제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 칸트는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개념인 불안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건 당연하다. 그는 불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의 품 안에서 뭐가 불안할까.


불안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150쪽)


전적으로 동의한다. 번역조차 하지 않는 실존주의 브랜드의 트레이드마크, Angst다.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존재이기에 거기에 있다. 이 불안을 쉽게 피하는 방법은 당연히 신으로의 도피다. 이미 니체가 신을 살해한 다음인 20세기의 철학자로서 하이데거는 신을 거부했다. 그러나 Dasein이라는 이데아가 목적지라면, 그건 신으로의 도피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소결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하이데거 철학을 소로(Thoreau) 철학과 동치에 놓는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가는 길은 달라도 같은 곳에 도착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역사상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엄정했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론이 도착한 곳이 겨우 소로의 월든이라면, 허탈하기 이를 데 없다.


<존재와 시간>만을 받아들이고, 하이데거의 다른 모든 생각을 거부하는 것도 내 자유다. <논리철학논고>만을 받아들이고 그의 후기 철학을 거부하는 비트겐슈타인 빠돌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빈 학파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가 했듯이 <존재와 시간>을 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내 자유다. 내게 하이데거는 현상학자다. 인류 역사상 인식론 테크트리를 가장 밑바닥까지 찍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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