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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Oct 10. 2023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책을 읽고] 위근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aespa의 Spicy 가사가 아니다.

그리고 보통은 순서가 반대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는 말은, 21세기에도 아직 요원한 소수 의견(성향)에 대한 응원과 옹호다.

만화 <열혈강호>에서는 악당(?)이 이런 말을 하니, 식상함도 이미 만렙 찍은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제목은 참 잘 지었다.

어떤 의견은, 다르다고 용납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틀렸다. 그런 의견은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원래 이런 글, 그러니까 프로 불편러의 글은 안 좋아한다.

투덜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안 좋아지니 당연하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에서 프로 불편러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감한다.


Black Lives Matter 구호 앞에서 All Lives Matter 피켓을 들고 위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답답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저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일 민족 국가라서, 인종 문제는 마이너한 편이고, 가장 큰 것은 역시 남녀, 좌우, 빈부, 세대 갈등인 듯하다.




유아인의 애호박


학교 다닐 때 여자 동급생들에게 대체로 페미니스트 평을 듣던 나다.

그런 나도 유아인 애호박 사건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다른 이유로 공적이 된 유아인이지만, 여기서는 애호박 사건에만 집중하자.)


"순교자가 된다는 것이 당신이 옳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이클 셔머의 이 통찰은 "온라인 생태계와 인권 운동의 정신을 교란하는 폭도"들과 "일당천"(모두 본인 발언에서 인용)으로 전투를 벌이는 중인 배우 유아인에게 꼭 필요해 보인다. (61쪽)


유아인 애호박 사건을 논하는 것은 자신도 없고, 이 책에 대한 내 감상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니 패스하자. 나는 예전에 만원 지하철에 탄 여자가 느끼는 위협감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평소 달리지도 않던 댓글이, 그것도 항의 댓글로 달렸다.


스위스에서 근무하던 시절, 블레스라는 이름이 특이한 친구와 같이 일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이름도 멋지고 매너도 훌륭한 이 남자와 송별 식사를 하는데, 이런저런 얘기 중에 역차별 얘기가 나왔다. 

자신은 스위스 국적 백인 남자이니, 외국인, 여자, 유색인종 우대 정책으로 공무원 되기가 바늘 구멍 낙타 수준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칼미-레이가 청년들과 대담을 할 때, 이 친구는 손을 번쩍 들고 그런 이야기를 실제로 했다고 한다. 블레스는 절대 여혐이나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과, 그가 PC적 맥락에서 얼마나 점수가 높은가는 별개의 것이다. 마약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한 유아인이지만, 그는 애호박 사건 전에는 분명히 개념 있는 연예인의 대표 주자 중 하나였다.

PC 척도에서 높은 점수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피곤하게 느껴진다. 미투 운동이 거셀 당시 펜스룰이 등장한 것은 위험 예방의 측면도 있지만 더 편하게 사는 것을 선호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


반면, 휴머니즘으로 포장된 <나의 아저씨>가 사회적 부정의를 그저 멀뚱하게 구경하는 남자들을 무해하게 묘사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훨씬 이해가 쉽다.


아내인 강윤희(이지아) 역시 밖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이며 그런 그가 집에서 꼬박꼬박 동훈을 위해 밥을 차려주는 장면은 아무런 문제 제기나 연민 없이 그려진다. 동훈의 휴대전화에 윤희는 이름이 아닌 '집사람'으로 저장되어 있다. (367쪽)


유아인의 발언이 다소 부적절한 것은 맞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잘못됐던 걸까? 아니면, 논란이 된 이후에 너무 열심히 싸워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걸까?


페미니즘 좀 가르쳐 달라는 말에 "공부는 셀프"라는 비아냥을 듣는 게 정답이라는 저자의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상대성 이론이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였다면 "공부는 셀프"라는 면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상대성 이론은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성별이 되어볼 수는 없다. 더 어려운 문제란 말이다.



알고 보면 쓸데없는 신박한 잡지식들


이 책에서 가장 속 시원했던 내용은 소위 지식 셀럽에 관한 내용이다. 경제 강사가 경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미술사나 인공 지능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예능 인문학과 지식인의 방송 진출은 당의정을 입힌 지식의 인기보다는, 지식의 권위를 덧입힌 '구라'의 인기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292쪽)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부류의 지식 소매인들이 정책적 처방이나 "제대로 사는 법"을 떠들 때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쪽 분야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법륜 스님도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조심스럽다. 행운으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그걸 어떤 공식으로 쟁취했다는 듯 부자 되는 법을 강의하는 세태가 말해주는 것은 황금만능주의뿐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였다면, 소송감이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로버트 기요사키나 엠제이 드마코는 소송 중일지도 모른다. 프로 불편러의 존재는 그의 투덜거림이 가려웠던 곳을 긁어줄 때 빛난다.


한 명의 자유인으로서의 그가 해당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이 의견을 구하고 마이크를 쥐어줄 때 그의 허술한 발언엔 지적 권위가 과잉부여된다. (173쪽)



소결


이런 책들은 잘 나오지도 않고,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니 솔직히 읽고 싶은 생각도 잘 안 든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나도 참, 아직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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