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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피하는 방법

[책을 읽고]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by 히말

프로야구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 정지훈.

그의 노래 중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이유는, 제대로 살고 싶어서다.

그가 정말로 피하고 싶은 것은, 고통이다.


news-p.v1.20230722.dfd06cb978da4a1bb04d9cb1ef42e9f1_P1.jpg 사진 출처 - MK스포츠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반이 된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고통을 피하는 방법으로 고통을 나누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다.

그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첫 번째 영역, 고통의 본질


<루나의 전세역전> 92쪽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떤 고통은 너무나도 나만의 것이라, 나눌수록 한없이 고독해지는구나."


전세금을 사기당한 고통은 삶을 나락으로 빠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냥 상상만 해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심지어 네가 멍청하니까 사기에 당하지, 하는 느낌도 전해진다.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문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제1부는 고통의 본질에 관해 다룬다. 결론은 간단하다. 고통은 말해질 수 없다.


고통은 본질상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울부짖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자신의 고통이 절대적이며, 남의 고통은 그에 비하면 하찮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남의 암 투병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말로 전달될 수 없으며, 고통에 대해 듣는 사람은 지쳐간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보통 노인들이 다 겪고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고통이 되고 말았다. (42쪽)


더 심각한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고통이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의 유가족 모임이 힘겨운 이유가 그렇다. 그들은 고통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래서 고통을 반으로 줄이고 싶지만, 고통은 본질상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서로에게 울부짖게 되고, 아픔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는 그 아픔의 개별성 때문에 결국 해체된다.


다행인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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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영역,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


그렇다면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소통하면 되는 걸까? 제2부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론장>이 <검투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공론장에서 고통을 토로한다. 마을 공동체였던 옛날이라면, 이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러나 인터넷 떄문에 그 공론장은 극단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통은 절대적이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최악의 고통이다. 마을 공동체에서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은 한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묶는 광활한 오늘날의 <공론장>에서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올림픽이 벌어진다. 공론장은 고통의 전시장이 되고,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고대 로마의 검투사처럼, 구경꾼들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더 비참하다고 외쳐야 한다.


검투라는 쇼를 준비하는 노예사냥꾼들은 오늘날 플랫폼이라는 모습을 하고 있다. 검투사들은 고통 토로자들이며, 구경꾼은 오늘날에도 구경꾼이다. 이것이 검투장으로 퇴화한 현대의 공론장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빈곤포르노>가 바로 이 장르의 서브장르라고 볼 수 있다.


검투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검투 쇼를 파는 사람들뿐이다. 플랫폼은 구경꾼들 사이의 싸움, 그리고 고통 토로자들의 비참함을 재료로 돈을 번다. 개인적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전환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고통으로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이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존재감 상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산업과 시장이 먼저 나타났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을 파는 TV 프로그램들이 생겨났고 사람들이 거기에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산업과 시장이 주목했다. (101쪽)


umit-yildirim-m-AwU3YcXeE-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Ümit Yıldırım


세 번째 영역, 개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회를 고쳐야 하는 상황


제3부에서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고통 당사자는 말할 수 없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고갈되므로, 소통으로서의 말을 그들 역시 할 수 없다.


고통 당사자에게 곁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듯,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도 곁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에 해결의 열쇠가 있다. 고통의 곁의 곁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곁의 곁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글이어도 좋다. 글은 울부짖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 그래서 글은 말할 수 있다. 심지어, 고통 당사자조차 글로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남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공허하다. 그 남과 헤어지고 홀로 있는 순간, 나를 인정하고 알게 해준 그 남은 언제든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온 인정과 앎 역시 허망하게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다. 홀로 남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남을 넘어선 남’, 남이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자기와 함께하고 있는 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남을 넘어선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162쪽)


그래서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일, 즉 <동행>은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말과 글의 자리는 고통이 위치한 바로 그 자리, 즉 그라운드 제로가 아니라, 그 고통의 <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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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사람 또는 글에 의해 가능하며, 그 방식은 고통의 곁의 곁을 또 누군가, 아니면 무언가(글)가 지켜야 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 고통의 곁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사회단체에 전화를 걸어온다. 몇 시간에 걸친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면, 고통 당사자는 울부짖는다. 사회단체라면서, 이야기도 못 들어주냐고.


고통을 겪는 이에게 절망은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 고통의 곁에 있는 이에게 절망은 고통을 겪는 이가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곁에 서 있는 자신을 끝끝내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165쪽)


고통이 무너지지 않도록, 고통의 곁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려면, 바로 그 고통의 곁에 또다른 곁을 구축해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사회담론에 관해 글을 쓰는 저자야말로,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이 책의 마지막이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의 보잘것없는 결과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이 책을 드린다. (206쪽)


averie-woodard-azyQ0Zd8za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verie woodard


이 대단한 책을 읽고 난 소회


이런 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성찰의 밤을 거쳐야 이런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걸까.


결국 개인이 안전하려면 사회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지는 결론은 아쉽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기 전에 거쳐가는 수많은 성찰, 고통과 존재와 관계의 본질에 관한 통찰이야말로 이 책의 진가다.


세상은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만은 온전하게 지켜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 헤맸다. 종교, 사회적 제도, 그리고 민족국가까지도 그런 헤맴의 결과다.


그러나 그런 <관계 맺음>은 배타성을 핵심으로 한다. 소외된 사람들의 희생이 없이는, 그 무엇도 뭉칠 수 없다. 개인이 안전하려면 사회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다시 깨닫게 하는 요즘이다. 난 21세기에 전쟁은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개인을 위험하게 하는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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