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으로 갓생 살기 - 영양제 (5) 제품 선택
제품을 만드는 방법
제품 자체에 대한 신뢰성도 문제다. 영양제, 즉 건강기능식품은 의약품이 아니다. 의약품이 아니고 식품이기 때문에, 훨씬 더 느슨한 규제를 받는다. 이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건강기능식품은 사실상 누구라도 만들어 팔 수 있다.
포털 첫 화면에 들어갈 때마다 무협지에 나올 것 같은 (강아지 눈이 번쩍 뜨이고, 몸 안 깊숙이 숨어 입 냄새를 뿜어내던 괴물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해괴한 환약 광고가 춤을 추는 데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강호에 은둔해 살고 있던 고수들이 인터넷 세상에 나와 불쌍한 중생들을 구하는 중인데, 이게 다 의약품이 아니라 건기식이라서 그렇다.
검증된 상품을 파는 것으로 정평이 난 창고형 소매업체에서 파는 제품 중에서도 재미있는 제품이 있다. PB 제품인 대용량 비타민 C가 그런 경우인데, 비타민 C 1,000mg이 들어 있다는 알약 하나의 무게가 1,300mg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두소가 1,000인데, 만두피에 싸서 만두를 만들었더니 1,300이 되었다는 얘기다. 아주 두툼한 만두피다.
만두피는 글루텐이니 맛이라도 좋아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이건 비타민 제제다. 그러니까, 비타민 1,000에 모래 300을 섞어 송편을 빚었다는 말이다. 모래는 먹어도 배출되니 문제없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마구 먹어도 되는 걸까? 나처럼 하루에 12그램씩 메가도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비타민 C 먹는다고 매일 모래를 3.6그램씩 먹는 셈이다.
더 흔하게 발견되는 비양심 행태로는 원료나 성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식품의 경우, 고추장을 파는 경우라면 고추장의 원료가 무엇인지 죽 나열해야 하지만, 고추장 떡볶이를 파는 경우라면 고추장, 떡, 방부제 이렇게만 써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 고추장과 떡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쓰지 않아도 된다.
영양제의 경우, 시아노코발라민이 대표적인 경우다. 메틸코발라민인지 시아노코발라민인지 명시하지 않고 그냥 "비타민 B12"이라고 쓰여 있다면, 시아노코발라민일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도 먹어야겠다면
MMORPG에 인생이 저당잡혀 살 때다. 고생은 죽도록 하고 먼 길로 돌아가면서 렙업했던 본캐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부캐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레어템으로 도배해 가면서 애지중지 부캐를 키웠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다. 40렙에 보라돌이 도끼를 쓰면 뭣 하나. 45렙만 돼도 그 보라돌이 도끼는 모양만 번지르르한 허접템이 된다. 그냥 45레벨짜리 보통 템을 써도 그것보다 낫다.
"우리 아이에게 먹일"이라는 문구는 거의 마법 구문이다. 예컨대 "우리 아이에게 먹일" 유기농 쌀과자는 당연히 유기농 햅쌀로 만들었고, 그래서 매우 비싸다. 맛도 참 좋다. 액상 과당은 물론 "딸기 맛 소스"가 들어 있고, 프로폴리스까지 0.01% 함유되어 있으니 오죽 할까.
액상 과당은 옥수수, 그것도 GMO 옥수수로 만든 것이고, 구체적인 성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딸기맛 소스에는 아마도 몸에 안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난 적색 2호 색소가 들어 있을 것이며, 프로폴리스는 아마 양봉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는 뜻일 거다. (실제로 프로폴리스가 0.01% 들었다고 쳐도, 달라질 것은 물론 없다.)
플로폴리스까지 들어 있는 유기농 쌀과자를 먹이느니, 그냥 과자를 먹이지 않는 편이 아이의 건강에 훨씬 좋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아이에게는 한없이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이 현상은 자식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공자도 말했고, <도박 묵시록 카이지>의 작가도 말했듯이, 부모님께 도리를 다하는 이유는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냥 벌꿀 대신 프로폴리스 0.01% 포함 벌꿀을 사드리게 된다. 프로폴리스는 벌꿀과 연관성이라도 있는 물질이라 다행인 것이고, 실상은 프로폴리스가 들어 있는 한우 갈비 세트라든가, 돼지감자 추출물이 들어 있는 벌꿀 같은 해괴한 상품들이 판을 친다.
예컨대 루테인 제품에는 "눈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백이면 백 다 쓰여 있다. 그러나 루테인의 효능이라고 입증된 것이라면 황반 변성의 진행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다는 정도다. 황반 변성의 예방에 관해서는 아무런 실험 결과가 없다. 그런데도 "눈은 900냥"이기 때문에 루테인을 챙겨 먹게 된다. 그러나 황반 변성이 이미 진행 중인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루테인을 챙겨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많은 안과 전문의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 모두의 결정 장애
컴퓨터를 바꿀 때마다 딜레마에 빠진다. 그냥 가성비 좋은 거 살까 하다가, 조금씩 사양을 높여가다 보면 어느새 원래 생각했던 예산 두세 배 가격대를 보고 있다. 다시 원점으로 리셋하고 다시 이것저것 뜯어고치다 보면 아까 올라왔던 고지에 다시 올라서 있다. 세상사 모든 것이 비슷하다. 영양제도 다르지 않다.
챙겨 먹으려고 생각하면 챙겨 먹을 것 천지다. 2045년 기술적 특이점이 오면 냉큼 클라우드에 자기 뇌를 통째로 업로드하겠다는 레이 커즈와일은 그때까지 살아남겠다고 챙겨 먹는 영양제 1년 예산이 십억 원 정도 된다고 한다. 위로 올려다본다고 다 그런 그림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슈퍼에서 파는 저가 영양제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챙겨 먹는다는 말로 유명해진 제품이 있다. 그러나, 성분을 따져 보면 금방 알게 된다. 이 영양제가 얼마나 대충 만든 제품인지 말이다. 트럼프가 의외로 가성비를 따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헛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잘 먹고 운동 잘하면 영양제 따위 필요 없다는 얘기도 사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챙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양제인 비타민 D, 오메가-3 지방산, 유산균은 모두 영양제 없이도 보충이 가능한 것들이다. 다만, 백주대낮에 30분 동안 상반신 탈의 상태로 돌아다니고, 끼니때마다 등푸른생선 찜을 신김치와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현대인이 사는 방식, 특히 지구라는 독특한 별을 학대하는 방식에 질린 사람들이 많다. 별이 부서지는 천 년 전의 하늘과 자연 농법, 그리고 깨끗한 공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나온 <Victorian Heyday>라는 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듯, 영국인들이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빅토리아 시절은 실상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하고, 식수를 믿지 못해 맥주를 마셔야 하며, 신상 캔 참치를 먹고 수십 명이 불가사의하게 죽어 나가던 시절이다. 21세기 들어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진 것 같지만, 예전에는 미세먼지 측정까지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무위자연을 주장하던 노자는 산속으로 은거했지만, 같은 생각이었던 장자는 그냥 산 밑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 <자연인이다>의 게스트처럼 살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현대 사회를 규정하는 도시 생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루에 30분씩 상의 탈의 상태로 해를 쬐는 대신 비타민 D를 챙겨 먹는 쪽이 편하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현대인의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면, 그것도 좋은 생각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