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뻘글
선율과 노랫말이 조화롭다면 최고의 음악일 것이다. 물론 가사 없이도 좋은 음악은 얼마든지 있다. 또한 쇼스타코비치 이후로 불협화음이 음악이 된다는 주장도 꽤 존재한다. (이 문장 때문인지 꿈에 쇼스타코비치가 나왔다. 헐.)
분명히 즐거운 멜로디가 있고 구슬픈 멜로디가 있다. 아일랜드 민요인 Toss the Feathers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도 흥겹고, 잉글랜드 민요인 Green Sleeves는 가사 없이 들어도 슬픈 노래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아리랑은 구슬프고 쾌지나칭칭은 흥겹게 들릴 것이다.
선율과 맞지 않는 노랫말을 억지로 욱여넣으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뚥흙송으로 유명한 Tunak Tunak Tun을 들어보자. 흥겹기는 하지만, 이 노래가 사랑 노래라는 게 믿겨지는가? 이 노래 가사는 연인을 달에 비유하는 전형적인 사랑 노래 가사다. 뮤직비디오나 춤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 노래는 개그라는 정서로 통했을 게 분명한데, 대체 왜 이런 가사를 붙였을까 생각하면, 유행가는 사랑 노래라는 기본 공식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게 아닐까.
Backstreet Boys 노래 중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Everybody는 댄스곡이다. 그러나 선율만 생각하면 딱 군대 행진곡이다. 물론 군대도 상황에 따라 춤을 출 수 있으니 무리한 상황은 아니다.
Ed Sheeran의 경우도 Thinking Out Loud는 선율과 노랫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만 (내가 매우 좋아하는) Shivers의 선율은 사랑의 떨림을 전하기에는 뭔가 어긋나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좋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메탈 곡들은 선율과 노랫말의 조화가 뛰어나다. 얼터너티브와 프로그레시브 락에서도 그렇다. 예외가 조금 더 많지만 갱스터 랩이나 힙합의 경우에도 대개는 조화가 맞는다. (에미넴이나 NF의 노래를 들어보라.) 이런 장르가 아니더라도, Queen이나 R.E.M.의 음악도 거의 대부분 조화가 뛰어난데, 곡 만드는 사람들의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율과 노랫말이 따로 노는 노래들은 대부분 소위 유행가라 불리는 부류에서 나온다. 작곡가와 작사가가 다르고, 종종 편곡이나 믹싱도 다른 사람이 하는 분업 구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데, 예컨대 (G)I-DLE의 퀸카나 Stay-C의 Bubble, aespa의 Spicy 같은 노래들은 노랫말와 음률이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Ed Sheeran 같은 천재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사실은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다작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데뷔 앨범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유명 소설가의 최고 작품이 데뷔작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선율과 노랫말이 어긋나는 사례를 더 많이 들 줄 알았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안 좋은 기억을 굳이 떠올리기보다는, 이대로 그냥 잊고 싶다. 좋은 일만 생각하기에도 빠듯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