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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29. 지옥불 호수

by 히말

노숙은 단지 지붕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

두 시간마다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이준기는 가장 괴로운 중간 시간 불침번을 자원했다.

금방 잠이 들고 깨는 체질이라, 군대에 있을 때도 중간 시간의 불침번이 힘들지 않았다.

불침번 파트너는 같은 소대 힐러, 하정태.


남자 둘이 모이니, 군대 얘기가 꽃폈다.

더구나 불침번을 서는 중이니.

몰래 라면 끓여 먹던 이야기에 이르자, 갑자기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으아, 라면. 들어오기 전에 해물탕이고 자시고 라면을 먹는 건데. 라면느님.” 하정태가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라면, 저는 너무 먹어서 지겹네요.”

“형, 말 놓으시라니까요.”

“아, 그래. 미안해, 정태야.”


“라면느님은 언제나 진리죠.”

“구원자 되고 나서, 좋은 거 많이 먹지 않았어? 나는 아직 초짜라 뭐 별로 그런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전 라면이 젤 좋아요. 던전에 라면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건 그렇네. 던전표 식량은 참 맛이 없으니.”

“그러니까요. 이렇게 불침번 설 땐, 역시 봉지면이. 캬~. 침 넘어간다.”


다들 자는 고요한 시간에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마치 라면 냄비같이 보였다.


“양은 냄비에 끓여야죠?”

“그런 희귀템이 있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일단 파를 좀 썰어 넣어야죠.”

“파 좋지. 파 송송, 계란 탁.”


“형은, 라면부터 넣어요? 아니면 수프부터?”

“난 수프는 맨 마지막에 넣는데?”

“오오, 저랑 똑같네요. 그게 그렇게 해야 라면의 본질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렇지. MSG의 진한 향취가. 하핫.”


“형, 이렇게 얘기해 보니까 그냥 보통 사람이네요.”

“응?”

“멀리서 볼 때는 좀 무섭다고나 할까. 너무 진지하다고나 할까. 그랬는데.”

“하하. 그래? 예상외네. 내가 진지해 보여?”


“나중에, 협회 행사 같은 거 하면 자주 봬요, 형.”

“그래. 그러려면 죽지 마라.”

“아이, 참. 죽긴 누가 죽어요? 존나 센 우리 공격대에서. 아까 애드나서 오크 30마리가 한꺼번에 덤볐는데도 이겼잖아요.”

“그래도 위험했지.”


“형 힐도 제가 한 번 넣었어요. 피가 별로 지 않던데요? 엄청 침착하게 잘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들 신기하게 생각하는 거죠. 형은, 제가 느끼기에, 한 20 렙대 중후반? 그 정도 경험이 되는 구원자 같아 보인다고요.”


“자꾸 주변에서 비행기 태우니까 어지러워. 그러지 마.”

“암튼 뭐 우리 공격대는 최강이라고요. 박충기 대장에, 한상태, 권영호, 길수연.”

“동료가 센 건 좋은 거지. 하지만, 결국 네 목숨은 네가 지켜야 하는 거니까.”

“넵, 알겠습니다. 누가 보면, 제가 14렙이고 형이 20렙인지 알겠어요. 하하.”


***


새벽 네 시에 불침번을 끝내고 잠이 든 이준기는 일곱 시에 눈을 떴다.

또 장혁수가 없어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제정신이야? 여긴 2층이라고.”


장혁수가 나타났다.

베르사체 재킷이 온통 피바다였다.

“하, 하하. 대장님, 저 칭찬해 주세요. 새벽부터 공격대에 도움 되려고 전투 연습했습니다. 잘했죠?”


박충기가 앞으로 나가서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다. 깔끔해요!”


“야, 장혁수! 여기 2층이라고. 내가 몇 번 말해야 돼? 이제 힐링 포션을 살 수도 없다고. 이제 힐링 포션 없으니 폭힐이라도 달라 이거야? 네가 탱커냐?” 박충기가 폭발했다.

“아, 정말. 우리 대장님. 경험치 쌓아서 공격대에 도움 되려고 그런 거잖아요.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힐링 포션은 몇 개 남았어?”

“어제 그대로예요. 강매는 사절입니다.”


"또 개인 행동하면... 그때는 알지?"

박충기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장혁수는 여전히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경새재 길드의 메인 스폰서, 서라벌 그룹 장오현 회장의 아들 장혁수.

장오현 회장 입장에서 봐도, 아들이 죽는 것보다는 길드 마스터에게 혼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장혁수가 공격대에 있는 것만으로도 박충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통제가 안 되니, 더욱 불안했다.


“한 번만 더 개인행동을 할 경우, 공격대에서 내보내겠다.”

“히힛.”

“여기 공격대원 전원이 증인이야.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을 내가 어길 것 같냐?”

“키킥. 알겠습니다, 대장님. 길마님.”


던전은 1층도 넓었지만, 2층은 더 넓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차원문과 마찬가지다.

단지, 던전 안에 있을 뿐.

1층, 2층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이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 2층이 1층 위에 포개져 있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니까 기후나 면적이나 서식하는 몬스터가 비슷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1층과 마찬가지로 오크들이 깔려 있었다.

오크 학살자의 반지를 낀 이준기의 오크 대상 치명타율은 여전히 무려 54%에 이른다.

레벨업을 하면서, 민첩성에 몰빵하기가 어려워서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수치.


2층에 올라와 처음에는 조금이나마 몸을 사렸던 메인 탱커 한상태.

1층과 별다를 것도 없고, 스킬 책도 재생된 상태라서, 이제는 처음처럼 마구 들이댔다.


열 마리 정도 오크 무리를 향해 돌진으로 전투를 개시하고, 한두 마리가 남은 시점에서는 그걸 2탱 성나린과 3탱 윤동직에게 넘기고 다른 무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공격대장 박충기도, 메인 힐러 길수연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워낙 매끄러운 탱킹에, 힐링 포션을 물처럼 마셔대니 당연했다.


그렇게 공격대는 맵 중앙 언저리까지 별 탈 없이 전진했다.

갑자기 공기가 뜨거워졌다.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뜨겁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공격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눈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

그 아래에는 기포를 부글거리며 마그마가 들끓고 있다.


‘지옥불 호수’에 다다른 것이다.

무섭기는 해도,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공격대원들.

뭔가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눈앞으로 두둥실,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


“꺄아악!”

2소대 딜러 문아린이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탱커들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화염 정령이 불 주먹을 날린 것이다.

놀란 한상태가 위협음을 내질러 화염 정령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르르르르.

화염 정령이 기괴하게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한상태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파팟!

공기 중에서 붉게 타오르는 창 두 개가 나타나서 한상태를 찔렀다.


반사적으로 팔을 쳐든 한상태.

화염 창 둘 중 하나는 전설급 방패 ‘아스트라아제’에 막혀 사라져 버렸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한상태의 허벅지를 찔렀다.


“흐읍.”

한상태가 비명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물, 물 전문화 딜러!”

공격대장 박충기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여기 있습니다!”

소현배가 활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주변을 돌던 파란 색 ‘물의 책’ 두 권이 그의 활 끝에 모이면서 얼음 화살로 바뀌었다.


콱!

마치 콘크리트 구조물에 쇠 파이프가 박히는 소리가 나면서, 얼음 화살이 얼음 정령의 팔뚝에 적중했다.

화염 정령을 둘러싸고 활활 타오르던 화염 오라가 사그라들었다.


“뭐, 뭐지?”

물의 책으로 소환한 얼음 화살을 당기던 소현배가 활시위를 놓으며 말했다.

조금 전 화살은 그가 쏜 것이 아니다.


“준기 형!”

“꺄아, 준기 오빠!”


이준기가 강화 국궁에 얼음 화살을 하나 더 장전했다.

길수연의 힐을 받고 일어선 한상태가 다시 화염 정령을 도발했다.

얼음 화살 두 개를 맞은 화염 정령은 아까보다 훨씬 덜 뜨거운 오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스톤 스킨!”

콘크리트 색 오라가 한상태의 몸을 감쌌다.


스톤 스킨은 물리 저항을 높여줄 뿐이다.

1급 탱커인 한상태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이준기는 얼음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으면서 한상태를 향해 외쳤다.

“흙 보호막!”


그 말이 자기한테 하는 말임을 알아듣고, 한상태가 ‘흙 보호막’ 스킬을 시전했다.

다음 한 차례의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스킬.

화염 오라로 인한 대미지는 들어오겠지만, 물리 저항이나 올려주는 스톤 스킨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


소현배와 이준기가 연이어 얼음 화살을 쏴대자, 화염 정령을 감싸고 돌던 불의 기운이 어느새 완전히 가셨다.

이제 남은 건 식은 마그마 덩어리에 불과하다.

화염 오라에 팔다리를 그을려 가까이 붙지도 못하던 공격대원들이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이준기도 강화 국궁을 패시파이어로 교체하고 화염 정령의 뒤로 돌아가 검을 휘둘렀다.


- 33!

- 화염 정령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화염 오라가 사라진 화염 정령은 동급의 다른 몬스터에 비해 물리 저항도 낮은 물렁살에 불과하다.

공격대원들이 둘러싸고 집중 공격을 퍼붓자, 불이 꺼진 화염 정령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휴우.”

“후아.”

여기저기에서 공격대원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준기!” 한상태의 목소리였다.

“네?” 이준기가 돌아보았다.

“넌, 탱킹도 할 줄 아냐?”

화염 정령이 쓰러지자마자 달려 온 건지, 한상태가 이준기의 눈앞에 서 있었다.


한상태.png 한상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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