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읽고] 와다 히데키, <80세의 벽>
의대 신입생들에게 <노인 체험>을 하게 했더니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언제가 접했다. 노인 체험이라는 게 별 게 아니다. 무거운 외투와 모래주머니를 착용해 움직임을 둔하게 하고, 귀마개와 뿌연 안경으로 시청각을 약화시킨 정도다.
저자도 아직 60대다. 그러나 그는 노인과 의사다. 그가 이야기하는 80세의 벽에 관해 듣다 보면, 저 의대생들만큼은 아니어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메시지가 명확하고 간략하게 핵심이 정리되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첫째, 80세가 되면 그 전과는 다르게 할 수 없는 일이 급격히 많아진다. 둘째, 따라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즐겁게 살자.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저런 힌트를 던져준다. 그건 책 뒤표지에 나오는 몇 개의 문장으로 쉽게 요약된다.
--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도 된다. (술 포함)
-- 건강 검진은 받지 말자.
-- 암은 절제하지 않는 것이 낫다.
--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등 수치는 신경 끄자.
-- 약은 몸이 좋지 않을 때만 복용하자.
-- 운전면허는 반납하지 말자.
-- 운동은 무리하지 말고 산책 정도로 하자.
-- 두뇌 훈련 같은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자.
-- 인지장애가 되어도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80세 이후는 70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어제까지 가능했던 일이 오늘은 안 되는 상황을 수없이 맞닥뜨린다. (10쪽)
그렇다면 답은 뭘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에게는 쉽게 하는 조언이지만, 당사자가 되면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은 해결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대사를 남발했지만, 정작 이 조언이 자신에게 날아들었을 때 그렇게 하지 않다. 죽더라도 반항하는 쪽을 택했고, 결국 죽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나은 거라면,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해 보인다.
많은 의사들은 환자에게는 약이나 검진을 권하지만 정작 본인은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약이나 검진으로 수명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그들은 환자에게 ‘혈압이 높다’거나 ‘간 수치가 나쁘다’며 다량의 약을 처방하고, ‘작은 암이 발견되었다’며 수술을 권한다. (19쪽)
각종 건강 수치에 신경 끄고, 건강 검진도 받지 않고, 만약 암이 발견되어도 그저 암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다.
저자는 아직 60대다. 책에도 나오지만, 과도한 의료 시술을 거부하던 사람도 막상 닥치면 결정을 번복하는 경우는 많다. 저자도 어쩌면 80대가 되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린 결론이 대개 더 현명하다. 나중에 번복하게 될지는 몰라도, 평생 의료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노년의 초입에서 내린 결론은 더 객관적이고 현명한 것이 아닐까.
건강 지표에 대해서는 나도 한 마디 보태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의학 실험은 백인 남성이 아직도 골드 스탠다드다. 머릿수로는 백인 남성 인구가 가장 많지 않지만, 권력자의 머릿수로는 분명 그래서 그렇다. 때문에 흑인, 여성, 아시아인, 어린이들에게는 건강 지표의 기준이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동양인의 경우, 백인 남성에 비해 훨씬 낮은 BMI에서도 각종 성인병이 발생한다. 췌장 기능이 약해 인슐린 펌프가 더 쉽게 고장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BMI 25부터가 과체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3이 한계선이다. 혈압은 물론, 각종 유해 물질에 대한 반수치사량(LD50) 역시 동양인에게는 기준이 많이 달라야 한다. 그러나 관련된 실험 결과는 아직도 매우 부족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주객전도다. 각종 건강 지표는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데이터일 뿐이다. LDL 수치가 높다고 스타*을 챙겨 먹고 수치만 낮추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원래 의도했던 것은,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수치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챙기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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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좀 더 구체적인 조언들이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날짜를 기입해서 서면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판단력은 충분해도 기억력은 불확실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방법이 많은 도움이 된다. (120쪽)
일사병과 탈수증이 겨울철 감기 사망보다 훨씬 많다. 에어컨을 틀고 물을 챙겨 마시자.
기저귀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기저귀로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바로 포기하지 말고, 기억의 실마리를 더듬어서 떠올리려 노력해야 한다. (143쪽)
조금씩 자주가 좋다. 조금씩 먹고, 조금씩 걷고, 조금씩 잔다.
수면제는 복용할 필요가 없는 약이다. 불면증으로 죽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자리에 누우면 본인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자는 것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면 낮에 자면 그만이다. (149쪽)
단골 병원(주치의)을 정해두도록 하자. 집에서 가까운 내과 의사(이른바 동네 의사나 방문진료 의사)를 추천한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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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읽어보면 좋을 구절들도 기록해 본다.
담배가 암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는 하지만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암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즉, ‘암 예방에는 금연이 유효’하지만 암이 발생한 후에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야 면역력이 높아져서 암세포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88쪽)
이럴 때는 너무 잊으려고 애쓰지 말고 다른 일에 시선을 돌리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즉,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으로 덧씌우는 것이다. 눈앞의 재미있는 일에 의식을 집중하다 보면 싫었던 기억은 저절로 사라진다. ‘과거를 똑바로 마주 보고 극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현대 정신의학은 이 방법에는 부정적이다. (101쪽)
과거가 풍요로웠던 사람은 아무래도 그 차이를 뺄셈으로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재를 불행하게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버리는 것은 너무 쓸쓸하다. 되도록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잃은 것이 아니라 늘어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바쁘게 살았는데”가 아니라 “지금은 시간이 많아서 여유롭고 모든 일을 내 페이스대로 할 수 있어”라고 하듯이. (104쪽)
'고독은 자유다’라고 발상을 바꾸면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105쪽)
인지장애의 본질은 이상행동을 하거나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면 인지장애가 더 빨리 진행된다. 악순환의 고리인 셈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행동하기가 중요하다. (127쪽)
“옛날에는 잘나갔다” 혹은 “너무 고단한 인생이었다” 하는 식으로 지난날의 자기 모습에 얽매여 있던 사람도 인지장애가 심해지면 싱글벙글 행복한 얼굴이 된다. 이것이 인지장애의 좋은 측면이다. (129쪽)
인지장애 환자는 다양한 의미에서 안전을 중시한다. 자동차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높임말을 쓰게 된다. (131쪽)
‘오늘은 하기 싫다’라는 마음이 들면 게으름을 부려도 된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쉬어도 된다. 참지 말고 마음이 편한 쪽으로 행동하자. (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