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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16. 2024

의미란 무엇인가 - 데닛 대 로벨리

[책을 읽고]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4)

이 책은 정말 좋았고, 어쩌면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책들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지금 읽는 책을 제일로 느끼게 하는 로벨리는 정말 대단한 작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다소 빡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제6장에 등장하는 의미론이다.


몇 년 몇 달을 걸려 대리석 안에 갇혀 있던 피에타를 꺼내는데 성공한 미켈란젤로를 상상해 보자.

그때, 누가 다가와 피에타를 한번 쓱 훑어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아, 이거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만들었군. 간단하잖아."


이거, 빡치는 상황 아닌가?


또는, 사상 최초로 전기차를 구상 중인 한 과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가솔린 폭발시키고 피스톤 상하운동을 캠으로 회전운동으로 바꾸고 하는 복잡한 것 대신, 그냥 전기 써서 모터 돌리면 되잖아?"


누가 그걸 모르나? 실제로 하려면 모든 연결 부분을 설계하고 만들어야 한다. 세부사항을 모르고도 큰 그림은 말할 수 있다.


<햄릿>이 못된 삼촌에게 복수하는 조카의 이야기라고 요약하고 모든 게 설명됐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고민 같은 거 다 생략하고 복수 ㄱㄱ


의식이란 무엇인가


로벨리에 따르면, 섀넌의 정보 이론에서 정보란 가능한 상태의 수를 세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설마 섀넌이 처음 하지는 않았겠지.) 섀넌은 더 나아가 훨씬 중요한 얘기를 한다.


두 변수가 각각의 가능한 상태 수의 곱보다 적은 수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면 ‘상대적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44쪽)


이것이 앞서 로벨리가 "관련 정보"라 말한 것과 사실상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생물은 바로 "상대적 정보"를 가지고 생존 확률을 높이는 생존 기계라고 수 있으며, 그 생물의 구조 자체가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상대적 정보"의 집합체로서 훌륭한 사례다.


다른 한편, 생물학적 진화의 발견 덕분에, 우리는 생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개념과 자연계의 다른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5쪽)


주지하다시피, 물리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TOE를 찾아 헤매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러나 물리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2진수로 소프트웨어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미친 짓이다. 그래서 화학, 생물학, 사회학 이런 식으로 더 거시적인 시각을 다루는 학문이 성립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학문들이 근본적으로 타당성을 가지려면, (수학을 포함한)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대니얼 데닛과 안토니오 다마지오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철학자들이 분투하는 영역이 바로 여기다. 무식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분투의 현장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로벨리는 한마디 툭 던지고 끝낸다.


기능(보고, 먹고, 숨 쉬고, 소화하는 등 생명에 기여하는 것)이 그 구조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145쪽)


맥락과 실체, 존재와 목적(기능)을 뒤집는 시각이니 신선한 것은 맞지만, 로벨리는 분명히 엄청난 거리를 비약하여 결론만 툭 던지고 만다. 대체 구체적인 설명은 어디에 있나? 단 하나의 사례라도 들었다면 이 부분을 읽으며 반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물리적 개념과 의미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가 발견되면 나머지는 회귀적으로 따라옵니다.(148쪽)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데닛도 디마지오도 바로 그 첫 번째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평생을 던지는 중이다.


Daniel Dennett (photo by Dmitry Rozhkov)


의식도 다르지 않다


챕터의 다음 절에서, 로벨리는 데이비드 차머스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아주 대차게 깐다. 과연 깔 만한 사람이다. 차머스는 의식의 문제를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나누고, 그 두 문제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영혼이 없는 <좀비>의 예를 든다. 그런데, 이거 어디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설의 <중국어 방>과 똑같은 구조다. 나는 다른 글에서, 설의 <중국어 방> 논증이 논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억까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junatul/222310676020?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간단히 말해, 어떤 음식이 짜장면과 똑같이 생겼고 같은 냄새에 같은 맛이 나지만, 짜장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분자 요리법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그게 짜장면이 아닌가? 면을 치대지 않으면 짜장면이 아닐까?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매뉴얼대로 중국어를 해석할 수 있는 시스템인 <중국어 방>은 그 시스템 자체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차머스의 좀비도 마찬가지다. 그건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다. 만약 차머스의 논증이 맞다면, 우리는 다시 유아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하지만, 분명히 나와는 아주 결정적으로 다르다. 좀비인 것이다.


그것은 뇌우의 물리학을 이해한 후에도 뇌우를 제우스의 분노와 연결시키는 (차머스의 표현으로) ‘어려운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156쪽)


로벨리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짜장면은 짜장면이다 (사진: 국립국어원)


어쨌든 좋은 내용


책의 이 부분이 별로다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이 책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어쩌면 더 많은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챕터다. 예컨대 다음 구절은 바이러스가 생명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는 생물학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DNA 분자는 정보를 암호화해 전달합니다. 정보가 이토록 안정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생명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입니다. (146쪽)


단일나선의 RNA가 이중나선인 DNA보다 덜 안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쯤 되면 바이러스는 생명이라 할 만하다.


또한, 앞서 소개한 차머스의 삽질 논리에 대해서도, 로벨리는 매우 일관되고 정합적인 결론을 내린다.


저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나’는 잘못된 형이상학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정을 실체로 착각하는 흔한 실수의 결과인 것이죠. (156쪽)


이건 불교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마이클 싱어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마이클 싱어는 나는 의식하는 바로 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관찰자"라고 하는데, 비록 실체를 가정하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본질은 로벨리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가르침도 같다. (로벨리는 이미 나가르주나를 얘기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소들이 잠시 질서 있게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 것이 생명이다. 인간의 뇌가 생존 기계의 효율을 위해 발명한 의식 내지 기억이 실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본말전도다.


그리고, 의식과 마음에 관한 논의에서도 로벨리의 결론은 같다.


과정과 사건, 상대적 속성과 관계들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괴리는 훨씬 줄어듭니다. 우리는 두 현상 모두, 상호작용의 복잡한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자연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7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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