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또 읽고] 찬호께이, <13.67>
찬호께이의 <13.67>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던 게 2년쯤 전이다.
최대한 스포 없이, 좋았던 책에 대한 평을 남겼다.
https://brunch.co.kr/@junatul/736
윌라에 <13.67>이 등장한 것을 계기로, 다시 이 즐거운 책을 읽었다.
활자로도 좋지만, 목소리가 들어가면 또 다른 감흥이 있다.
유쾌한 천재 경찰, 관전둬의 조금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포를 포함하는 소감을 남겨보려 한다.
*** 강력한 스포일러 등장합니다. 소설을 먼저 읽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입니다. ***
천재지만 괜찮아
“그건 아니고.” 관전둬가 웃었다. “사건이 해결됐으니 다들 퇴근할 거 아닌가. 사람들 퇴근하기 전에 사무실에 가서 케이크를 먹어야지! 그걸 안 먹으면 얼마나 낭비냔 말이야.” (318쪽)
부하 직원들이 사놓은 은퇴 축하 케이크가 그냥 버려질까 두려워 사무실로 가겠다고 대답하는 관전둬다.
관전둬는 천재 탐정이다.
이런 식의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왠지 거리감을 느낄 법도 하다.
책에 대한 한줄 평 중에 천재 탐정으로 손쉽게 사건을 해결하는 게 별로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분야의 시조새 격인 셜록 홈즈부터가 천재다.
셜록 홈즈가 별로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적어도 내게는 없다.
셜록 홈즈 역시 사람 냄새를 풍긴다.
집안이 엉망진창이고, 담배는 기본이고 아편을 하기도 하며, 아주 가끔은 실수도 한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의 견지에서 볼 때 너무나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천재라는 설정이 셜록 홈즈의 매력을 감소시킨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관전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사줄을 뽑는 스번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관전둬, 천재지만 괜찮다!
“스번톈 씨, 내가 아까 말한 건 다 거짓말이오. 당신은 절대 죽지 않을 거요. 지금 당신 팔에 주사되고 있는 건 탈수 방지용 영양제이고, 케토프로펜은 이미 다 주사됐거든. 그리고 아스피린과 케토프로펜은 둘 다 비스테로이드 소염진통제라 두 가지를 함께 쓴다고 해서 간부전을 유발하진 않소. 제일 심각한 상황이라야 경미한 위궤양 정도일까. 물론 채혈이나 치아 기록 대조로도 신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난 당신이 직접 인정하는 꼴을 봐야만 만족하겠단 말이지.” (295쪽)
시민을 보호한다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무고한 시민에게 제도가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108쪽)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누워 있는, 제1장에 등장하는 관전둬의 대사다.
장면은 스승 관전둬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뤄 독찰의 회상이다.
뤄 독찰이 관전둬의 유지를 이어 훌륭한 경찰로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나름 가슴 벅찬 장면이다.
시민의 보호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그 근본은 인명 존중이다.
이 생각은 이 소설의 여러 장면에서 인상 깊게 드러난다.
스번성을 제압하러 진입하라는 TT의 명령을 거부하며 동료 경찰의 목숨을 지키려는 뤄샤오밍.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스번성이 인질을 다 죽이기 전에 한 명이라도 시민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울부짖는 TT도 마찬가지다.
(물론, TT의 진상에 대해 알고 난 다음에는 소름이 끼치지만.)
이 생각을 가장 호소력 있게 내비치는 인물은, 아무래도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화자) 아닐까.
“당신은 ‘경찰의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1호차의 폭탄을 해체했어. 그런데 어제는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지. 당신이 보호해야 하는 건 경찰이야, 시민이야? 당신이 충성하는 건 홍콩 정부야, 홍콩 시민이야?” 나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 도대체 왜 경찰이 된 거야?” (598쪽)
인명을 구하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경찰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그가, 2013년 시점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입안에 쓴맛이 느껴지게 만든다.
그저 그렇지만 깊은 맛을 내는 반전
6개의 에피소드로 된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큰 반전이 담겨 있다.
물론 다른 에피소드들에도 반전은 많다.
탕링이 살아 있었다든가, 가오랑산이 아니라 TT가 나쁜놈이라든가, 시장 상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스번톈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1967년 사건 최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은 시간적 스케일 때문에 임팩트가 크다.
사실 이런 식의 반전은 대단히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어찌 보면 장난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말해, 별로 품이 들지 않는 종류의 반전이다.
그러나 46년의 세월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라는 관점에서 조금 생각해 보면, 꽤 깊은 맛을 낸다.
(품이 별로 안 드는데 깊은 맛이 난다면, MSG 아닌가?)
1967년 사건의 주인공인 <나>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불세출 천재 탐정이 될 관전둬를 능가하는 머리는 물론, 사람들을 살리려는 마음씨도 훌륭하다.
그런데 46년 후, 이 사람은 아직 탄로나지 않은 (않았다고 믿는)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혼수 상태의 환자에게 치사량의 모르핀을 주사한다. (그 환자가 누구냐 하면...)
이런 좋은 사람이 형처럼 따랐던 사람 역시, 아주 추악하고 추잡한 범죄자로 진화한다.
삶은 어쩌면,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
나는 2년 전의 소감에서, 두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사건과 다섯 번째 사건은 너무 작위적이고, 여섯 번째 사건은 추리적 재미가 떨어져서였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인간적 따뜻함, 즉 탕링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네 번째 에피소드는 TT라는 독특한 악당과 총격전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두 번째, 세 번째로 다시 읽어보니, 역시 최애 에피소드는 세 번째 사건이다.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이 에피소드에서 뤄샤오밍과 관전둬가 사부-제자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의 상호작용도 가장 많고,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도 제일 많이 드러난다.
최애 에피소드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자네만 괜찮다면 앞으로는 ‘사부’라고 부르게. 나도 자넬 제자로 생각할 테니.” (322쪽)
너무 관전둬 얘기만 했는데, 뤄샤오밍도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재규어가 계산대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소갈비 무볶음밥이 얼마냐니까!”
샤오밍은 아무도 몰래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점심을 사러 온 것뿐이었다.
“시, 십오 홍콩달러요.” (348쪽)
다음 장면.
무만 담지 말고 소갈비도 담으라는 상대의 말에도, 너무 당황한 샤오밍은 무만 계속 담는다.
악당들에게 정체가 탄로나기 직전, 샤오밍을 구해준 것은 바로 TT다.
이 장면을 처음 만나면, TT는 실력도 뛰어나고 인성도 좋고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이건 뭐 사기 캐릭이다.
“젠장, 이 멍청한 자식! 일할 때 라디오나 듣고 있으니 뭘 제대로 하겠냐? 주변에 다 흘리기나 하고! 사장님이 손님 내쫓으라고 널 데려왔겠어? 비켜!” (중략)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멍청한 놈은 맞지 않으면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제가 음료수 서비스를 해드리겠습니다. 다음에도 꼭 와주십쇼. 탄산음료와 레몬차가 있는데 뭘로 하시겠습니까?” (350쪽)
탕링 이야기도 해보자.
탕링은, 가출소녀가 변신한 아이돌 가수라는 설정이다.
그러나 에피소드 말미에 뤄샤오밍이 만나는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뿔테 안경에 머리 모양으로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만화 같은 설정이고,
나 같이 눈썰미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람들 얼굴 알아보는 것이 일인 형사가 그런다면 문제가 있다.
어쨌든, 그녀의 이미지는 이 부분에서 대변신을 하는데, 효녀일 뿐 아니라 스마트하다는 이미지를 획득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열 사람에게 복수를 할 때마다, 그녀는 하나씩 검은색 페디큐어를 바르겠다고 다짐한다. 이 시점에서 페디큐어 수는 3개다.
여기에서 잠깐, 다시 첫 번째 에피소드로 돌아가 보자.
뿔테 안경을 쓴, 해커 이미지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뤄샤오밍은 그녀를 애플이라 부른다.
그녀의 행색은 이렇다.
콧잔등에는 두껍고 묵직한 검정 테 안경을 얹었고, 검정색 티셔츠와 낡아빠진 멜빵 데님바지 차림에 검정색 페디큐어를 바른 열 개의 발톱이 훤히 드러난 샌들을 신었다.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