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n 24. 2024

추리 소설, 아니, 소설

[책을 읽고] 양자오, <추리소설 읽는 법>

대만판 유시민이라 할 수 있는 양자오의 책이다. 독법이라는 멋진 제목을 썼지만, 실은 그냥 추리소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다. 그래도 나름 대학교 교양 강의를 엮은 것이고, 무엇보다 저자가 추리소설 대마니아라는 점은 인정한다. 재미있다.



소설을 읽지 않으면 악마가 될 수 있다


양자오에 따르면, 소설은 현대인에게 아주 요긴한 생활도구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과도 단절된 현대인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소설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와 같은 버스 옆 좌석에 앉은 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일상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빠르게 잃어 갔다. 18–19세기의 유럽 신흥 도시에서 점점 많은 사람이 갖가지 방식으로(대체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 이웃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혹은 공공장소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을 알지 못하면, 작게는 번거로움을 크게는 비극을 불러온다는 교훈 말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든 알아야 했다. 전처럼 당연하게 그들이 나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됐다. (중략) 어떻게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사이에 놓인 벽을 뚫고 그들의 생활을 보고, 그들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고, 그렇게 느끼도록 자극하는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을 통해서다. (177쪽)


옴진리교 사건에서 교육 수준 높은 공대 졸업생들이 교주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라 독가스를 살포한 것은 소설을 읽지 않아서다. 


사건에 가담한 교인은 대개 이공 계열 출신이었다. 그들은 젊었으며, 자신의 학문 영역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룬 ‘사회의 엘리트’였다. 이런 사람이 어째서 아사하라 쇼코를 믿고 숭배하고 따르게 되었을까? 그들이 소설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대지’ 관점으로 힘들고 성실하게 얻은 결론이다. (102쪽)


역사는 우리 현실이 우연임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따분한 역사서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소설을 통해 훨씬 더 잘 이뤄질 수 있다.


역사의 가장 큰 의미와 핵심 역할은 우리의 현실 생활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올바른 필연은 없다는 것을 반복해 일깨우는 데 있다. (165쪽)



사회파 추리소설


미야베 미유키의 장에서, 양자오는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전후 일본에서 발명된 새로운 추리소설의 형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추리소설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추리소설은 대개 사회문제를 드러내지 않을까?


아니, 소설이라는 게 사회 문제를 드러내지 않을 방법이 있나?


소설이야말로 우리에게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소설의 기능이다. (178쪽)


요즘에는 흔해 빠진, 몇 명의 사람들이 어딘가에 갇혀 수수께끼를 풀다가 죽고 죽이고 하는 류의 영화, 드라마도 거의 전부 사회의 어떤 양상을 드러낸다.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나는 셜록 홈즈 다음으로 접한 추리 소설이 김전일 시리즈다. 나는 두 번째 사건, <이진칸촌>과 세 번째 사건 <유키야샤>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인간에게 이렇게도 깊은 감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충격에서였다. 김전일이 종종 말하는, "풀 길 없는 슬픔"이다.


이진칸촌 살인 사건 (c) 사토 후미야, 아마기 세이마


셜록 홈즈 사건에서도, 특히 <진홍빛 연구>에서 풀 길 없는 슬픔이 등장하지만, 김전일의 앞의 두 사건에서 범인들의 과거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쨌든,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고 있을 때, 작가가 조금 더 사회 문제를 생각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은 이런 식의 분류가 인류에게 가져오는 혜택이라 할 수 있다.


찬호께이의 <13.67>을 다시 읽으면서, 작가의 말을 읽었다. 나는 작가의 말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작가는 텍스트 자체를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작가의 생각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오히려 얕다는 걸 알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찬호께이 역시 그랬다.


나는 <망내인>을 읽고 나서 찬호께이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13.67>을 다시 읽으니, 이건 정말 역작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찬호께이는 대단한 작가가 아닐지 모르지만, <13.67>은 이 시대의 역작이다.


찬호께이는 그런 역작 자체로 독자에게 말을 걸고, 그걸로 끝냈어야 했다. 개별 사건은 사건해결식 추리소설이고, 옴니버스 전체로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식의 사족은, 정말 사족에 불과하다.


아무튼, 작가들은 이미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말을 이미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장르를 세분하고 이름 붙이는 것은 아무튼 여러 가지로 편리하니까 말이다.


***


사진: Unsplash의Lucas Medeiros


아래는 기억해 두고 싶어 밑줄 친 구절들이다.


-- 장르소설은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장르소설에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작품을 읽는 독자 사이에 이미 약속된 특수한 사항이 있다.

--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빈틈은 모두 왓슨과 관련 있다.

--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자 아쉬움은 왓슨이 언급은 했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도 내용을 찾을 수 없는 사건의 나열이다. (56쪽)

-- 코넌 도일이 하나하나의 사건에서 런던의 세세한 지리에 신경을 쓴 덕분에, 이야기가 한번 발표되면 자신의 생활권에서 벌어진 일을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런던의 독자들은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필요가 있다. (59쪽)

-- 우리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두 편이 아닌 전편을 모두 읽었을 때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 중 하나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점점 분명해지는 ‘나의 친구 홈스’의 모습이다.  (61쪽)

-- 확실히 헤밍웨이의 문장에는 단어와 구절의 중복, 뜻의 중복처럼 중복되는 부분이 무척 많아, 번역자가 원문대로 번역하기가 민망한 나머지 번역을 하면서 약간씩 변화를 주어 우리가 보통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습과 닮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81쪽)

-- 탐정의 과시는 탐정추리소설 내부에 장착된 필요 기능이다. 과시하지 않으면 명탐정의 추리가 가져오는 읽기의 효과가 줄어든다. (157쪽)

-- 소설 기법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검증된 하나의 원칙은 한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쓰면,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19쪽) - 이런 흥미로운 관점을 확신 있게 내뱉는 것이 양자오의 매력 중 하나다!

매거진의 이전글 6월 셋째 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