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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Sep 05. 2024

억울한 세계사

[책을 읽고] 타밈 안사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지는 조건들이 있다. 아랍인으로 태어나거나, 모태신앙이 이슬람인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만약 내가 그런 조건에 처해졌다면, 나는 저항할 수 있었을까? 


제3자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그들에 대한 지식을 구할 수 있을까? 어떤 아랍인 유튜브를 보고 이슬람과 무슬림의 차이는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 지식은 피상적이었다. 다른 책을 읽던 중, 타밈 안사리가 썼다는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고, 결국 책을 읽게 되었다.


가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책 또한 그랬다. 이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니, 적어도 세계정치 관점에서는 이슬람을 옹호하던 내 관점이 오히려 흔들리는 결과가 발생했다.



유럽 문화 중심의 세계사에서 이슬람이 얼마나 억울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포함된) 중국 문화권 역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승자의 시각에서 쓰였다 하더라도 세계사는 분명히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세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분량도 만만치 않다.

반면, 이슬람이 아직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등장하기 전에 대해서, 나는 학교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배운 가장 굵직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핏줄을 중시하는 변태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리는 초대, 2대는 물론 3대 칼리프조차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2대, 3대 칼리프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그는 앞의 두 칼리프의 모든 결정을 그대로 받들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바람에 제3대 칼리프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제3대 칼리프로 선출된 우스만을 따랐다. 그는 떠밀려 4대 칼리프가 되는 바람에 순교자가 되고 말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의 피를 조금이라도 이어 받은 사람들은 대대로 사냥을 당해야 했다.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며 행진한다는 시아파 이슬람 행사에 대해 듣고 나서, 시아파에 대한 인상이 대단히 안 좋았다. 중세도 아니고 21세기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적어도 초기에는 시아파가 수니파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했다고 생각한다.


둘째, 오늘날 이슬람 세계 내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각종 악덕이 제2대 칼리프 우마르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토머스 아퀴나스와 주희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교조주의의 창안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보다는 청출어람이었던 제자들이 더했다.)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니, 전 우주를 찾아봐도 호모 사피엔스 외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아퀴나스, 유교에서 주희의 역할을 한 악인이 이슬람에서는 바로 제3대 칼리프 우마르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던 쿠란을 정리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정한 그 버전(비록 최종 확정판은 다음 칼리프에게 나왔지만)에서 한 글자라도 벗어나면 배교자라 칭했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시대착오적 행태는 모두 바로 이 자의 어이 없는 경전 정립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슬람교는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점을 이미 아득히 넘어섰다.



이 책은 대단히 방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방어적인 서술은 종종 방어는 물론 자기 합리화를 건너 자가당착에까지 도달하고는 한다. 아쉽게도, 이 책 역시 그러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의 제1 관점은 이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이 책의 제2 관점은 시아파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관점이다. 그런 편향이 너무 심하게 느껴져서,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저자의 종교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저자는 이슬람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이슬람교도라 할 수 없다. 학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시아파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믿고 있으며, 그 이유를 시아파 박해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시아파 대 수니파는 그들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슬람의 바깥에 서 있는 우리에게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래서 제1 관점, 즉 이슬람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관점에 집중해 보자.


적어도 문화적인 관점, 특히 성 평등 관점에서 이슬람이 한심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지하드 전사에게 약속된 천국에 두당 72명의 미녀가 주어진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일부 다처제는 또 어떻게 방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라비아는 일부다처제 사회여서 아내를 한 명만 두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무함마드는카디자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60쪽)


일부다처제가 떳떳하다면 이런 서술은 아예 필요하지 않다.

이슬람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논쟁 거리인 지하드를 살펴보자.


지하드는 결코 성전이나 폭력을 의미한 적이 없다. 아랍어에는 더 분명하게 싸움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따로 있다. (77쪽)


미안한 얘기지만, 그건 아랍어뿐 아니라 한국어나 영어도 마찬가지다. 싸움과 폭력을 지칭하는 단어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지하드의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든, 말이란 변화하는 생물이다. 지하드의 대상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들이며, 그들이 죽어도 좋다는 식의 폭력으로 형상화되고, 그 과정에서 이슬람을 믿는 자들 또한 죽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겨우 저런 문장으로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에게 민족주의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은 국수주의로 편향된 시각조차 빠뜨리지 않는다. 중세와 십자군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을 보자. 중세에 아랍 문명이 유럽에 비해 우월했다면 (물론 이건 사실이다) 그런 우월한 부분들을 설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을 열거하는 대신 형용사 잔치를 선택했다. 우매한, 초라한, 원시적인 따위의 형용사로 유럽 문명에 관한 것들을 수식하면 아랍 문명의 우월성이 증명되는 것일까? 이런 형용사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감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이슬람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러면서, 이슬람을 옹호하려는 저자조차 이슬람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려 애쓰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았다. 21세기를 사는 유학자가 조선 시대를 옹호하려고 한다면, 비슷한 모양이지 않을까? 식인 전통을 가진 인류 집단의 후예가 그 전통을 옹호하려 해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 그게 역사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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