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권 자기 혁명]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2013년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었다. 단숨에 두 번 읽었다. 어느 주말에 친구와 등산을 하다가 그 얘기를 했더니 녀석은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두드려서 그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몇 년이나 지나서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빈부격차 이야기가 나와서 "너 그 책 읽었냐"라고 물었더니 녀석은 씩 웃으면서 "당연히 안 읽었지"라고 대답한다.
올여름 한 10년 만에 만난 오랜 친구에게 <맨 프롬 어스>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고 추천해 줬더니 그 자리에서 받아 적더라. 역시 아직 안 봤겠지. 박웅현의 서평을 읽으면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는데, 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질문을 던지는 서평
엄청난 반전이 있는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서평을 읽는 것은 책읽기에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서평을 통해 읽을 책을 고르는 방법은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물론, 서평의 설득력에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서평이라면 답이 아니라 질문을 준다. 소크라테스가 아무 이유 없이 책 한 권 쓰지 않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
답은 없어요. 각자의 독법이 다 다른 것이고요. 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폭 넓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듯합니다. (280쪽)
박웅현은 소개하는 책을 부드럽게 건넨다. 강권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소개하고, 왜 좋다고 생각하는지 말할 뿐이다. 다른 이들의 소감도 소개한다.
사실 이 책은 대입 논술 시험에 대비하여 박웅현이 딸과 함께 고전을 읽게 된 것이 강의로 발전하고,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려 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작하자마자 대뜸 니체의 영겁회귀에 대해 말한다. 무슨 뜬금포인가? 소설 하나 읽으려고 우선 니체 철학부터 공부하고 오라는 건가?
영겁회귀를 처음 듣는 사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재미있게 읽는다. 오히려 니체보다 영겁회귀를 더 잘 설명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영겁회귀의 맥락에서 봐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때 새롭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는데 중간 이후부터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읽었어요. 그리고 줄을 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줄을 치는 양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전에는 파도타기를 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지만, 어느 순간 제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줄을 치고 있더라고요. (233쪽)
한줄 한줄 음미하면서 줄 치고 메모하는 읽기, 이것이 박웅현이 권하는 독서법이다. 텍스트란 결국 저자와 독자의 대화다. 그래서 세상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읽은 각자 조금씩 다른 의미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존재한다.
내가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른 네 명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면서, 삶에 있어서 반드시 동반되는 허상, 즉 '키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그런데 네 명의 주장이 모두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프란츠를 제외하면 세 명의 비중은 거의 대등하다.
소설가가 여러 인물을 통해 관점을 제기할 때에는, 어차피 그중 하나의 관점에 작가 자신의 시각이 녹아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공정하다. 테레사와 (변화 후의) 토마스의 관점이 결국 정답으로 제시되기는 하지만, 박빙의 승부다. 나는 사비나의 관점도 버리고 싶지 않다.
박웅현은 친절하다. 자세하게, 왜 영겁회귀가 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는지 설명해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도까지 그려가면서 네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해석일 뿐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소개하는 장에서 저자는 네 명의 학생에게 느낀 점을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네 번째 학생이 말한 것과 같이, 안나가 특별히 색다른 존재는 아닌 것 같다고, 자기가 느낀 점을 말한다. 내 생각에 안나에 관한 박웅현의 의견은 소수파에 속하는 것 같다. 박웅현이 정답만을 말하려 했다면 다수파의 해석을 따랐을 것이다.
문학 작품에 단 한 개뿐인 '올바른 해석'이 없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특징은 고전에 유난히 강하게 나타난다. <트와일라잇>이나 <헝거 게임>과 같은 소설의 특징은 평면적 인물이나 뻔한 전개도 있지만, 다양한 해석이 불가능한 얕은 깊이가 대표적인 특징 아닐까.
고전을 즐기는 법
마크 트웨인은 독설가답게, "고전이란 모두가 이미 읽었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탈로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내린 정의가 마음에 와닿는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대개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단지 "나는 이 책을 읽고 있어"라고는 말하지 않는 책이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읽었던 책 열다섯 권을 다시 읽은 느낌을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책 <죄와 벌>에서부터, 그는 다시 읽기를 통해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런 인물이 존재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는데, 다시 읽고 보니 두냐야말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자라는 것이다.
<삼국지>를 처음 읽는 사람은 대개 유비나 제갈량의 입장에 몰입해서 읽는다. 두 번, 세 번 다시 읽다 보면, 조조나 손책, 여포의 입장에서 읽게 되고, 수십 번씩 읽다 보면 동탁이나 엄백호의 입장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잘하는 것은 싸움밖에 없는 동네 불한당 엄백호가 살아남는 방법은 그 정도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떤 책은 다시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읽고 나서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통곡물빵은 씹기 힘들지만 일단 소화되고 나면 정제밀 빵보다 오랫동안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책은 도끼다>를 읽고, 박웅현이 소개하는 여러 권의 고전 중 하나를 골라 읽어보자. 독서가 한 단계 진화할 것이다.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려운 한 길 사람 속을 그나마 잘 보여주는 것이 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