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권 자기 혁명]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정보 홍수의 시대. 책은 많은데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보나 지식 습득이라는 이유로 독서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지 요즘 서점에는 속독법도 아니고 아예 '대충 읽기'류의 독서법 책까지 등장했다.
서평 쓰는 것이 직업이라는 일본 사람이 쓴 독서법 책을 읽게 되었다. 한 달에 60권 정도 서평을 써야 하니 책을 대충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책에 부록으로 실려있던 저자의 서평 샘플이었다. 정말 책을 대충 읽었으며, 책의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글들이었다.
서평도 텍스트다. 텍스트라면 소통을 지향해야 한다. 서평을 대하는 독자는 책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 따라서 서평을 쓰려면 적어도 그 책이 무엇에 관한 책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책임이다.
예컨대 <그릿>이라는 책은 어떻게 그릿, 즉 끈기와 열정을 어떻게 함양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저자 앤절라 더크워쓰 본인도 그릿을 기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을 때는 책을 쓰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그릿의 특징만을 설명하고 만다면 그것은 서평의 기본적인 책무를 져버리는 행위다. 한 달에 60권 서평한다는 일본인의 서평이 그랬다.
서평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서평에 정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서평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므로,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좋은 서평이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앞서 말한 <그릿>의 서평을 읽기 전에는, 활자화되는 서평이라면 적어도 책을 잘못 소개하는 경우란 없지 않겠느냐고 막연히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도 엄연한 텍스트고, 여러 가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수많은 해설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에드문트 후설에 관한 사소한 지식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후설은 위대한 사상가지만, 글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쪽의 재능은 처절했다.
모두가 고전으로 인정하는 책만 읽는 것도 한 사람의 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 않는 책을 읽고 실망한 경우도 많고, 저자의 명성만 믿고 책을 골랐다가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 적도 많다.
<책은 도끼다>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은 읽지 않았을 것이다. <청춘의 독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반공 어용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평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서평에는 질문이 녹아 있다
나는 서평을 쓰려면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이 첫 번째다. 앞에서 말한 서평의 기본이 되는 '책 소개'를 하기 위한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상호작용의 또 다른 축인 글쓴이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변화란 거창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고 하게 된 생각도 변화의 훌륭한 사례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므로 그것도 분명한 변화다.
좋은 서평을 읽는 것은 다른 이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질문을 하고 답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간접 경험이다. 좋은 서평은 저자가 의도한 핵심을 짚어내고, 독자로서 자신이 느낀 점, 즉 책과 독자 사이의 화학반응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청춘의 독서>는 저자 유시민이 예전에 읽었던 책 열네 권을 다시 읽고, 그 느낌을 쓴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하고자, 저자는 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첫 번째 질문에 충실히 답한다. 그러나 이 책의 무게중심은 '책이 나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에 있다. 저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내게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책을 골라서 다룬, 지도 비슷한 것이다. 지도에는 길섶에 핀 들꽃이나 종달새 노래의 아름다움을 표시할 수가 없다. (314쪽)
저자 유시민의 삶이 어떠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청춘의 독서>에 실린 그의 책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간접 독서토론
나폴레온 힐은 종종 역사 속의 위인들을 마음속에 소집하여 중요한 문제에 관해 토론하곤 했다고 한다. 나폴레온 힐은 다만 상상력을 발휘한 것 뿐이지만, 서평을 읽게 되면 우리는 서평을 쓴 사람과 같은 책에 관해 토론할 기회를 실제로 갖게 된다.
<죄와 벌>을 다시 읽으며 두냐라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유시민은 말한다. 나도 <죄와 벌>을 읽었지만, 두냐라는 인물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 읽어서 그런지, 내게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햄릿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죄와 벌>은 내게 <햄릿>과 마찬가지로 거의 일인극이었다. 그런데 같은 책을 읽은 누군가가 내게 두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전은 '다시 읽는' 책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독서토론회에서 <은교>를 읽고 토론한 적이 있다. 젊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늙은 시인 이적요. 그가 젊음을 시기하다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 패퇴하는 과정, 그것이 내가 읽은 <은교>였다. 다른 이들도 대체로 나와 비슷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내게 굉장히 색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젊은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늙은이의 추악함 때문에 책 읽는 내내 분노했다는 것이었다.
그 의견이 너무나 신선해서, 나는 토론회 참가자들에게 그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의견을 제시한 사람을 포함해서, 여자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렇게 느꼈다고 대답했다.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은 단 한 명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다. 남자들은 이적요에, 여자들은 은교에 이입해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독서토론이 아니었다면 접하지 못했을 신선함이었다. 나중에 박범신 작가의 성추행 논란이 불거지자, 이 때의 독서토론 내용이 새삼 상기된 것은 물론이다.
서평책을 읽는 이유는 대개 좋은 책을 추천받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청춘의 독서>처럼, 이미 읽었을 유명한 책들이 가득한 서평책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가. 남의 서평은 그런 즐거움을 위해서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책을 추천 받고 싶다면 내가 신뢰하는 작가가 쓴 서평을 찾아보면 된다. 생각을 나누고 싶다면, 내가 신뢰하는 책에 관한 서평을 찾아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