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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답 3형제 - 존 설, 데이비드 차머스, 프랭크 잭슨

[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6)

by 히말

의식을 위한 생각도구


자, 이제 데닛의 평생 숙제인 '의식'에 생각도구를 활용해 보자.


데닛은 '진짜 돈'에 들어 있는 어떤 본질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고 있지만, 가장 직관적인 비유는 역시 좀비에 관한 것이다.


인간과 똑같아 보이는데, 어쩐지 인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존재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각을 '좀비감'이라 하자.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좀비는 영화에 나오는 느려 터지고 생각이란 없어 보이는 그런 동물이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이 보이고 느껴지지만 왠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존재다.


다만, 좀비감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명백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59장 중)


59장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에 관한 장이다. 그는 의식에 대해 쉬운 문제가 있고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말하는 쉬운 문제는 현재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의식의 수수께끼에 대해 알아내려고 하는 바로 그 문제, 즉 의식의 정체와 원리에 관한 문제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차머스는 이 '쉬운' 문제가 해결되어도 의식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는, 존 설이 말하는 중국어 방과 같다.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어떤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창조된다고 해도, 그 존재에게 '좀비감'이 느껴진다면 차머스와 설은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 자들의 '본심', 즉 정말 주장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다들 침묵하는 것 역시 흥미로운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데이비드 흄은 무려 1739년에 '좀비감'을 예언하는 듯한 글을 썼다. 250년 뒤에 우매한 후손들이 등장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 같다. (사실은 흄이 살던 시절에도 차머스나 설 같은 자들은 넘쳐났을 것이다.)


흄은 남들이 나와 다를지도 모른다며 농담조로 인정했지만, 타인이 어떤한가에 대한 자신의 빈곤한 경험으로부터 섣불리 추론하여 내가 좀비인지 아닌지 궁리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지금도 이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62장 중)


American-philosopher-John-Searle.jpg 그런 사람들의 대표, 존 설


자아의 실체


이 부분에서 데닛은 '무게중심과 같은 종류'로서의 자아를 제안한다. (어떤 저자는 이것을 오해하여, 데닛은 중앙집권적 자아를 주장한다고 쓰고 있다.)


손이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서명했다. 입이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내가 했다. 뇌가 파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억한다. 나는 우리가 나로 인식하는 살아 있는 몸의 '기록 소유주'다. (62장 중)


말하자면,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서사 무게중심'이다. 데닛에 따르면, 다중인격이란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의 인식 체계가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동조할 것이다.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우람한 운동 선수 앞에서 갑자기 분노조절잘해 환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문득 떠오른다.) 무게중심을 옮기는 그 행위가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뇌를 이용하여 실을 잣는다기보다는 우리의 뇌가 실을 이용하여 '우리'를 잣는 것이다. (62장 중)



타인현상학


1인칭 접근, 즉 자신의 마음에 침잠하는 것밖에는 활용할 도구가 없었던 후설과는 달리,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는 다양한 과학 도구가 있다. 그래서 3인칭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1인칭 현상('자아')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데닛이 자신의 학문을 지칭하는 '타인현상학'의 정의다.


이 방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면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1인칭' 의식 과학의 필요성이 사라지며, 통제된 과학 연구에서 접근할 수 없는 의식 현상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63장 중)


이 문장이 이 책의 한줄 요약이다. 우리는 과학적 접근과 도구를 통해 자아를 포함한 의식 현상, 즉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의 과학으로 부족하다면 과학이 더 발전하면 가능해질 것이다.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마법적 요소, 즉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나 설의 플러스 알파를 도입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색채학자 메리


호주 철학자 프랭크 잭슨은 색채학자 메리에 대한 사고 실험을 고안했다. 지루해할 사람을 위해 미리 말하자면, 이건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나 존 설의 '중국어 방'의 또다른 버전일 뿐이다. 따라서 멍청한 소리라고 치부하고 스킵해도 된다.


maxresdefault.jpg 멍청한 주장은 박제해야 제맛 (프랭크 잭슨이 사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제목에서 다 보인다)


그럼에도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사고 실험은 다음과 같다. 색채학자 메리는 흑백의 방에서 흑백 모니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연구하는 뛰어난 과학자다. 그는 붉은색, 푸른색 등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색을 대했을 때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모조리 다 알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흑백의 방을 나와 총천연색의 세상을 맞이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색채에 관한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고 충격을 받지 않겠는가?


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프랭크 잭슨은 '색채에 대한 뇌의 물리적 반응에 대해 모조리 알고 있다'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 모든 측면에서 짜장면과 같다면 짜장면이고, 모든 측면에서 인간 같다면 인간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어 방'도, 모든 면에서 인간 같지만 '좀비감'이 느껴지는 좀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색채학자 메리는 흑백 방을 나와 총천연색 세상을 마주해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데닛은 이 사고 실험에 대해,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뛰어난 '붐받이'라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중국어 방'과 비교해 더 나은 사고실험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멍청한 이야기의 다양한 버전일 뿐이다.


이 모든것(과 그 이상)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마치, 천각형을 관념화하라는 요청을 받아놓고 원을 심상화하는 것과 같다. (64장 중)


천각형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을까? 난 13각형 정도도 어려울 것 같다. 관념화와 심상화는 다르다. 우리는 천각형을 관념화할 수 있다. 그걸 가지고 논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마음 속에 그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색채학자 메리에 대한 사고 실험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충분히 파악(내지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David_chalmers.jpg 노답 3형제의 당당한 1인, 데이비드 차머스 (인상이 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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