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생물학 명강 라이브 1 (1)
이제 서양 의학도 체질 분류에 나섰다
인체의 해독 과정은 외인성 유래물질을 수용성으로 만들어서, 배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면활성제, 즉 친수성 꼬리와 소수성 꼬리가 양쪽에 달린 물질이 필요하다.
우리가 먹는 약들이 대개 이 경로를 활용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란 제각기 다 다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사상이니 오행이니 하면서 체질을 분류했지만 (뭐, 히포크라테스도 하기는 했다)
실험과 검증으로 발전해 온 근대 이후 서양 의학은 이런 구분을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뭐든, 초기 과정에서는 디테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기도 하고, 그걸 무시하고 진행해야 일단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이런 '디테일 무시'가 없었다면 서양 의학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서양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거의 모든 약물은 백인 성인 남성이라는 기준으로 임상 시험을 거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염색체 9번과 22번이 교차하는 현상('필라델피아 염색체')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은
그 대단한 글리벡조차 듣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한 질문이 발생한다.
- 염색체 검사 먼저 하면 되겠네?
그렇다.
이것이 바로 precision medicine, 즉 '맞춤형 의료'다.
정크 DNA
인간 유전자의 98%는 그동안 쓸모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소위 정크 DNA라 불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코드에서 출력에 관련된 부분은 전체에서 얼마만큼이나 될까?
출력에 필요한 중간 생성물까지 포함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다.
단지 단백질 합성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을 정크 DNA라 부르다니.
무식하니 용감한 것이다.
일단 중심원리를 다시 되새겨 보자.
DNA에서 RNA,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
정크 DNA는 뒤쪽 부분이 없다.
그러나 앞쪽은 여전히 존재한다.
정크 DNA도 RNA는 만든다는 말이다.
심지어 일부 RNA는 (단백질의 핵심 역할인) 효소 역할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RNA 세계 가설, 즉 최초의 생명 발생이 RNA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많다.
RNA는 당연히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즉 DNA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단백질 역할을 대신할 능력이 되고,
DNA보다 단순한 구조이므로 무질서에서 우연히 만들어질 가능성도 훨씬 높다.
다시 정크 DNA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경우, 단지 2%의 DNA만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
그런데 초파리의 경우에 이 비율은 무려 18%나 된다.
다시 말해, 고등 생물일수록 정크 DNA의 비율이 높다.
고등 생물에 쓸데 없는 정보가 많이 있는 걸까? (기존 학설은 그렇게 말했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정크 DNA가 뭔가 (어쩌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RNA Splicing
RNA 중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지 않는 부분, 즉 인트론을 잘라내는 과정을 RNA splicing이라 한다.
RNA splicing을 거친 RNA를 성숙한 RNA라 하는데,
고등 생물은 이 성숙한 RNA를 다양하게 만드는 기능,
즉 RNA splicing 능력이 더 뛰어나다.
책에 나오는 사례를 보면,
예컨대 1, 2, 3, 4, 5 다섯 개의 엑손을 가진 RNA에서
1-2-3-5를 결합하면 심근,
1-2-4-5를 결합하면 자궁근 단백질을 만드는 식이다.
예쁜꼬마선충의 유전자 수는 1.9만 개로, 인간(2.5~3만)에 비해 그다지 적지 않다.
인간과 예쁜꼬마선충의 차이는, 유전자 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RNA Splicing을 통해 만드는 다양한 조합의 수에서 비로소 그 차이를 제대로 드러낸다.
RNA splicing 이후 분리된 인트론이 (기능하는) 비암호화 RNA를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낭포성 섬유증, 색소성 망막염, 근육 긴장 퇴행 위축, 중추성 근위축증 등
RNA splicing에 문제가 있어 발생하는 질병들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예측 가능했던 결과다.
맞춤형 의료의 현실
다시 맞춤형 의료로 돌아가 보자.
암호화 DNA에 문제가 있다면, 단백질 합성에 문제가 있으니, 당연히 신체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크 DNA, 즉 비암호화 DNA 역시 어떤 기능을 하므로,
정크 DNA에 문제가 있다면 그 기능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이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약물 반응이 하나의 사례다.
같은 약물을 투여해도, 어떤 사람은 과도하게, 또 어떤 사람은 과소하게 반응한다.
전자의 경우 투여량을 줄이고, 후자에는 늘려야 할 것이다.
이런 약물 반응의 차이를, DNA 분석으로 미리 알아낼 수 있다.
이렇게 약물의 투여량을 개인별로 맞춤 처방하는 것도 분명히 맞춤형 의료다.
(결과적으로 사상이나 오행이론에 따른 한방 처방과 비슷해진다.)
'이레사'라는 이름의 항암제는
EGF(상피세포생장인자) 수용체 유전자 변이가 있는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이미 미국 FDA에 의해 한정 승인되어 출시되었다.
맞춤형 의료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맞춤형 의료에는 장애물도 많이 있다.
유전자 검사에 맞춘 처방 조정 정도의 초기 맞춤형 의료라고 해도,
유전자 검사 비용 부담은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지,
유전자 검사를 잘못한 경우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제약사는 이 제도의 시행에 반대할 유인이 아주 많다.
글리벡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매출 감소가 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병원들은 암 표적 치료 관련 유전자 맞춤 치료를 이미 시행 중이다.
글리벡 처방 전에, 앞서 언급한 '필라델피아 염색체'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고 있다.
아주 중요한 사족
전장 유전체 연구에서는 유의 수준을 대략 1억 분의 5 정도로 설정한다.
유전자 마커가 워낙 많으니 당연하다.
백만 개 정도의 유전자 마커를 대상으로 연구하는데 만약 (통상의) 5% 유의 수준을 적용하면,
그냥 우연으로 상관 관계가 나오는 것만도 5만 개다.
1억 분의 5라니,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이런 어마무시한 유의 수준은 입자 물리학에서나 보던 것 아니던가.
아무튼, 박수!
통계학을 가장 정확하게 사용하는 실용 분야는 역시 의학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