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찰스 디킨즈, <위대한 유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여주, 에스텔라
<위대한 유산>을 다 읽었다.
역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정말 탁월하다.
옅디 옅은 희망만을 남기는 마지막 문장, 그러나 이건 여전히 해피엔딩이다.
학창 시절, 찰스 디킨즈의 대표작이라는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에스텔라에 대한 핍의 사랑에 대해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핍에 대한 에스텔라의 부당한 행동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에스텔라가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la belle dame sanc merci라는 주제는 서구 문학 태동기부터 꾸준한 주제였지만,
이 전통이 묘사하는 대상, 즉 '자비심 없는 미인'은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경쟁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이건 단지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전통은 나중에 상당히 비틀어진 모양으로 오히려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의 유명한 시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Porphyria's Lover>에서 바람기 많은 연인은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교살당하며,
<My Last Duchess>에서 화자는 전부인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협박)한다.
(<푸른 수염>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어볼 수 있다.)
가질 수 없다면 파괴한다.
에스텔라의 차별성
내가 좋아하는 여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미모뿐 아니라 착하고 지혜로운, 팔방미인들.
나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지만, 연애 대상으로서는 아니다.
반면, 구체적인 묘사도 별로 없는 <햄릿>의 오필리어는 모두에게 대인기 캐릭이다.
밀레이의 그림 때문일까?
재상 딸이면 예쁜 건 기본이라고 가정하는 걸까?
또한 그녀는 작품 내내 별다른 특장점을 내보이지 않는다.
오빠(용기, 결단력), 아버지(지혜, 처세술)와는 달리, 그녀가 내보이는 덕목이라면 일편단심(loyalty) 정도다.
에스텔라를 살펴보자.
사랑에 배신당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남자라는 종(species)에 대해 복수를 다짐한 미스 해비셤.
그녀가 선택한 복수 도구가 바로 에스텔라다.
핍에게도 허영심과 같은 사소한 단점은 있으나,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조와 비디를 제외하면) 가장 도덕적인 인물에 속한다.
미스 해비셤의 복수 대상은 하필 그 종에서도 가장 선량한 개체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텔라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그것도 문제다.
사족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별' 아닌가.
수많은 사춘기 소년의 첫사랑, 스테파네트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당시 에스텔라에게 조금도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어떤 느낌은 꽤 강렬하게 받은 모양이다.
당시 만들었던 피아노곡에 <Falls Like Estella>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제목 자체가 그녀에 대한 나의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기록은 박제된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 곡을 기억하고,
또한 그녀를 기억한다.
아무튼, 이 곡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나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다.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하며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아름다우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기에 부족한) 어떤 존재의 파멸.
그런데 이제 다른 느낌을 받는 이유는 뭘까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다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핍의 사랑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고개를 격하게 주억거리며, 공감한다.
왜일까?
단순히 그녀의 외모 때문일까?
난 그녀의 외모를 기네스 펠트로에게서 떠올리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전혀 없다.
또한, 소설 속 에스텔라의 이미지가 기네스 펠트로와 비슷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컷의 기본 설계가
매력적인 암컷을 만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도록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면,
결국 유전자의 지배에 굴복하고 만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로 <페노메넌(Phenomenon)>이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존 트라볼타와 키라 세드윅의 사랑은 정말 멋지다.
어른의 사랑이다.
(에로스적) 사랑이란 감정은 기본적으로 미성숙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반례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한다.
"필요한 게 있어요?"
"가위요. 가위 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_K1lkLWzr0
<위대한 유산>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스텔라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이건 뭐 <깡디드>도 아니고,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핍 자신이 그렇게 서술한다.
그러나 둘은 친구로 남겠다고 말하며, 손을 잡고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이들이었던 둘의 사랑이
결국 성숙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주는 결말.
그러면서도 암시 이상의 확신은 절대 약속하지 않는,
그 결말의 여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