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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책을 읽다가] 찰스 디킨즈, <위대한 유산>

by 히말

*** 스포일러 있습니다. <위대한 유산>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주의하세요! ***


나는 찰스 디킨즈를 매우 좋아한다.

찰스 디킨즈를 다룬 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무려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남자>다.

스크루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과연 맞는 말이다.

(왠지 올리버도 크리스마스 느낌인데, 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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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리버 트위스트도, 스크루지(특히 디즈니 버전)도 좋아하지만,

찰스 디킨즈 최고의 역작은 <위대한 유산>이라는 일반적인 의견에 동의한다.


찰스 디킨즈의 광팬이라 자처하는 내가 (원본으로) 끝까지 읽은 찰스 디킨즈의 책은 딱 한 권인데,

바로 <위대한 유산>이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읽었던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아주 여러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단어 하나하나를 기억할 정도였다.


갑자기 후원자가 생겨 작은 마을의 명사가 된 핍에게 "May I?"를 연발하던 동네 아저씨(이름은 잊었다).

"Is this a cut?"이라고 묻는 소셜클럽 앙숙과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을 아주 길게 남기는 마지막 장면.


Phillip-Pip-Pirrip.Great-Expectations.jpg 2011년 드라마 판의 핍 (대장장이 수습생 시골소년 치고 너무 곱상...이 아니라, 나의 핍은 이렇지 않아!)


첫 번째 장면이야 워낙 유명해서, 나 말고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빅토리아 시대 디킨즈류 유머의 전형이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안 웃긴다)

비슷한 종류의 유머가 책 내내 아주 많이 등장한다.

"May I?"를 과연 한글로 어떻게 번역했을까, 하는 것이 학창 시절 이 책을 읽던 나의 궁금증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Is this a cut?"이라는 아주 생소한 표현 때문에 기억한다.

당시 내가 읽던 책에는 이 문장에 무려 주석이 달려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설에 주석이 달리는 일은 매우 희귀하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닌 다음에야.)


주석에는, 이 문 장의 의미가 현대 영어로 "Are you cutting me dead?" 정도라고 써 있었다.

나는 이 문장도 무슨 뜻인지 몰랐으므로, 사전을 찾아 봤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맥락 상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있다.)


한글로 하자면, "이거, 생까자는 거지?" 정도가 되겠다.


세 번째 장면은, 모든 소설들을 통틀어도 정말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이다.


<위대한 유산>은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이었고,

디킨즈는 당대 최고의 유명 소설가였기 때문에,

독자 편지가 말 그대로 쇄도했다.


그래서 연재판 엔딩은 지금의 엔딩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해피엔딩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디킨즈는 출판에 이르러 엔딩을 조정했다.

영화가 스크린에서 물러나 DVD로 나올 때쯤, 디렉터스 컷을 내는 오늘날의 영화감독과 비슷한 처지였다.


***


한줄평 정도로 끝내려던 이 책에 대해 별도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은, 36장에 나오는 장면 때문이다.

후원자의 정체를 언제쯤 알 수 있느냐는 핍의 질문에 대해, 변호사가 대답하는 장면이다.


p01zk4c7.jpg 2011년 드라마판 재거스 변호사


“그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그는 몸을 다시 똑바로 펴며 말했다. “자네와 그 사람은 직접 두 사람의 일을 해결하게 될 것이네. 그 사람이 자신을 밝히면 이 일에 있어서 내 역할은 끝나고 종료될 것이네. 그 사람이 자신을 밝히면 나는 이 일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을 것이네.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전부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 마지막 말로부터, 미스 해비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에스텔러와 짝 지으려는 계획에 대해 재거스 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가 이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또 그것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그는 그 계획에 진정으로 반대하여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하고 짐작했다. <위대한 유산 2>,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찰스 디킨즈, <위대한 유산>, 36장 중)


핍은 자신의 후원자가 (매우 당연하게도) 미스 해비셤이라 지레짐작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지금 이 상황이 되어도 후원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후원('위대한 유산') 담당 변호사인 재거스 씨는 런던 법조계에서도 꽤 대단한 인물이므로,

핍을 후원하는 일 따위의 잡일을 대체 왜 하는지,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콧대 높은 변호사가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미스 해비셤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고

추측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더 나아가서, 시골뜨기 청년을 에스텔라와 결혼(!)시키려는 미스 해비셤의 계획에 대해

변호사가 질투 감정 내지 반대 의견을 가진다고 짐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뒤에 일어나는 일은 다들 아는 바와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일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파악하고 해석하고, 더 나아가 예측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핍은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만의 틀에 갇혀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


하나 더 덧붙이자면,

아마도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선한 사람들인 조와 비디가 맺어지는 것에 대해,

(비디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귀결이지만)

주인공 핍이 어떻게 느꼈을까를, 우리는 또 핍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는 한다.


물론 우리는 그와 달리 3자적 입장에서의 정보를 더 가지고 있으므로,

핍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것들을 느끼고 생각한다.


MV5BYWU3ZGFjZmItMTliNS00MTgzLTk0NmYtNTAzMGVmYjczZThmXkEyXkFqcGc@._V1_.jpg 2011년 드라마판의 에스텔라


사족.

내가 이 책에 대해, 학창시절 당시, 그리고 지금 또다시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는 이유는,

내 삶에서 내가 마주쳤던 에스텔라와 비디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일까.


15.jpg 핍과 비디의 중요한 대화 (원작 삽화)

사족 둘.

미스 해비셤, 그리고 그 사람.

이 둘은 현실에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너무 비상식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장치가 있어서 <위대한 유산>이 성립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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