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톰 필립스, <썰의 흑역사>
실망했다
낚시가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모두 음모론자이고, 세상에 나와 있는 엄청 많은 음모론 중에는
분명 당신과 나의 입맛에 맞는 것도 있을 것이라 단언한다.
음모론이 위험한 이유는, 가짜 뉴스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저 재미로 썰을 푸는 데 그친다면, 그래서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면, 음모론이 왜 위험하겠나.
저자는 음모론을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을 모른다고 말한다.
다만, 도움이 되는 이런저런 질문을 해볼 수는 있다.
저자는 무려 11개의 질문을 나열하고 있지만, 난 두 가지로 충분하다고 본다.
반증 가능한가?
반대 증거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1번은 너무 뻔한 이야기니 스킵하겠다.
반증이 가능하지 않은 주장, 예컨대 사후세계가 있다든가 하는 주장에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는 전혀 없다.
결국 2번이 핵심인데, 이것 역시 아주 뻔한 이야기다.
음모론자들은 반대 증거가 나왔을 때, "그것(증거) 또한 음모다"라는 예측가능한 레퍼토리를 들고 나온다.
그래도 이건 "그런 개소리는 반박할 가치가 없다"라고 (T모 할아버지처럼) 말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톰 필립스의 책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실망한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 공저라서, 톰 필립스가 쓰지 않은 부분은 하품이 나온다.
둘, 아주 어이없는 주장을 만났다.
그 어이없는 주장이란, 캠브리지 애널리티카에 관한 내용이다.
허수아비 때리기
흔한 논증 오류 중 하나가, 허수아비 때리기다.
A라는 주장을 (터무니없는 주장인) B와 동치라고 주장한 다음 B를 반박하는 것이다.
음모론 이야기에 너무 빠졌는지, 똑똑한 저자들은 바로 이 오류를 저지른다.
(내가 다른 책들을 통해 접한) 원래 주장(A): 캠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페이스북에서 무단 수집한 정보를 불법적으로 구매하여 트럼프 대선 캠프를 위해 사용했다.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이 책에 나오는 주장(B): 캠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엄청난 조직이 페이스북 데이터를 활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했고, 그 결과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겼다.
난 두 번째 주장을 이 책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도 접한 적이 없다.
내가 책을 워낙 안 읽거나, 뉴스에 관심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난 첫 번째 주장을 책과 뉴스를 통해 수없이 접했다.
이 책 저자들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파괴력이 있는 주장 A를 무시하고,
훨씬 더 파괴력이 있는 주장 B를 열심히 논박한다.
(주장 A는 별 재미 없지만 주장 B는 워낙 흥미로워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주장 B가 과연 논박할 가치가 있는 주장인가?
이건 뭐 백신 음모론은 물론이고, 지구평면설조차 능가하는 희대의 뻘소리 같은데 말이다.
내 생각에는, 주장 A 그 자체로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고 본다.
그래서 청문회도 열렸던 것이고, 다큐멘터리도 나온 것이고, 내부고발자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부터 페이스북이라는 어이없는 기업(?)을 싫어했지만,
이 사건으로 페이스북을 악한 기업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다.
주장 A를 주장 B로 바꿔서 논박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어이없는 뻘짓이지만,
단순히 바보짓이 아니라 일종의 악행이다.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사건의 본질을 흐려버리기 때문이다.
주장 A를 주장 B로 바꿔 퍼뜨리면, 다름아닌 캠브리지 애널리티카와 페이스북(일명 메타)이 누구보다 좋아할 것이다.
모두가 분개하며 바로잡아야 할 사회악을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로 바꿔버리니,
누가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래도 인류는 진화하는 중
서두에 말했듯이, 저자는 (자신들을 포함한) 모두가 음모론자라고 단언한다.
이게 단지 수사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저 9/11에 관한 저자들의 단정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반론을 사전 차단한 것이다.
사실 반론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책은, "반박시 님 말이 맞음"이다.
몇 년 전까지 가장 유행했던 전략이 답정너였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인류가 좋은 방향으로 진화 중인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