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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무엇이 시인가

by 히말

예전에, Suzanne Vega의 노래 Luka의 가사가 시라고 말했다가 쿠사리를 당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강한 어조였다.

그게 뭐가 시냐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무엇이 시일까?


당시 나는 그 사람과 대화 중에 두 개의 노래를 사례로 들었다.

Queen의 Drowze는 그 사람이 몰랐던 노래였다.

Roger Taylor의 곡이니 (작사, 작곡은 물론 노래도 직접 불렀다) 모를 만도 하다.


두 번째로 말한 것이 Luka였고, 이 곡은 워낙 유명해서인지 그 사람도 알던 곡이었고,

곧바로 박박한 것이다.


Drowze는 삶을 돌아보는 일요일 오후의 오수를 노래한 가사다.

과거를 돌아보며, 젊었을 때는 세상이 참 쉬웠지, 라고 말하는 노래.


이 노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 로저 테일러는 27살이었는데,

사람들은 아직 한창 젊을 때 노년을 쉽게 상상하고 걸작을 써내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를 썼을 때 T. S. 엘리엇도 26살이었다.)


hqdefault.jpg 로저 테일러, 1976년 (27살)


그렇다면 Luka는?


내 이름은 루카, 2층에 살아요.
누나 윗집이죠.
맞아요, 본 적 있을 거예요.

밤 늦게 무슨 소리가 들릴 때 있잖아요.
뭔가 문제나 싸움이 벌어진 것 같은.
그게 뭐였는지 묻지 말아줘요.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학창 시절 읽던 영시 교재에는 밥 딜런의 시가 실려 있었다.


오늘 밤 버스에 타니 운전사랑 나랑 둘 뿐이네, 이봐, 운전사, 우리 한번 달려 볼까?


하는 시였다.

밥 딜런은 그 당시에도 이미 매우 유명한 가수였으니,

그의 '시'가 교재에 실려 있는 것은 눈길을 끌었고, 당연히 읽어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시냐? 라는 생각이 드는 시였다.

(오죽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시 내용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밥 딜런의 저 시보다

Luka의 가사가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준다.


***


시는 태초에 서사시로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암기하는 방법으로 운율을 활용한 것이다.


서정시로 옮겨감에 따라,

형식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은 동서양에서 똑같이 나타났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전부 다 iambic pentameter다.

한시의 오언, 칠언, 절구, 율시,

일본의 하이쿠(배구),

우리나라의 시조 모두 형식을 중시했다.


존 밀턴은 rhyme 맞추기 편한 이탈리어가 아닌 영어로 <실낙원>을 쓴다면서

라임 따위는 개나 줘버리겠다고 일갈했다.


시가 정말 시다워진 것은, 묘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이런 형식들을 걷어차 버린 다음이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0.5초 이하로 생각하고 써버려도 시가 되다 보니까,

시집 한 권 뚝딱 써서 아들 병원비 하라는 <가시고기>의 한 장면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무엇이 시일까?


셰익스피어는 2천 년을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3일치를 거부하고 진짜 희곡의 시대를 열었다.

시간, 장소, 사건의 일치는 필요없다.

효과의 일치만 있으면 된다.


무엇이 시일까, 하는 질문에도 같은 대답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1280px-Gilbert_WShakespeares_Plays.jpg Sir John Gilbert, <The Plays of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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