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라는 직업

[책을 읽고]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4)

by 히말

정치라는 직업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사람은 이것을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가지고 있다. 정치의 과업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267쪽,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재인용)


정치를 직업으로 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도덕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적어도 나는 이런 질문을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위의 책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도덕률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경고다.


앞 글에서도 말했듯, 존 스튜어트 밀의 우려대로 인류는 아직도

자유주의적 국가론이라는 담론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가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직도 최우선 과제다.

(헌법이 부여한 시민권을 박탈하겠다고 공약한 정부가 미국 땅에 2025년에 출범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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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추상 명사이고, 국가의 악은 실제로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

따라서 국가의 악행을 방지하는 일에 있어, 정치인의 도덕률 정립은 우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도덕과 정치인


나는 생각이 좀 다르지만, 유시민은 칸트의 도덕철학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칸트는 정언명령을 명령한 사람이다.

정언명령은 대단히 명쾌하고 단순하다.


칸트가 직접 언급한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살인을 저지른 친구가 찾아와 숨겨달라고 하면, 자수를 시키든가 경찰에 신고하라는 것이다.


이 사례는, 도덕철학의 양대 산맥 중 다른 하나인 공리주의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원래 한 사람 죽는 걸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태가 (만약 친구가 사형을 당한다면) 두 명 죽는 사태로 확대된다.


다소 과장을 했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이 헛점 없는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도덕적 딜레마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율주행이 현실로 다가온 21세기에 이 딜레마는 '트롤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재탄생했다.)


유시민, 그리고 막스 베버의 질문은 이것이다.

정언명령이 정치인에게도 적용되는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는 오로지 동기만이 의미를 가지는 반면, 정치는 동기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276쪽)


결과를 중시하는 도덕철학인 공리주의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유시민이 왜 벤담 대신 베버를 데리고 와서 이 논의를 진행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베버가 좋은 정치인의 자질로 열정, 책임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균형감각'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균형감각이란 다름 아닌 현실적 타협이다.

타협이 정치인에게 중요한 전략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진보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신념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타협을 거부한다.

유시민은 우리나라 진보 정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타협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 나온 애국가 제창 사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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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벤담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지 타협이라는 '기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결과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공리주의적 도구로도 충분히 커버가 되는 이야기다.


신념이란 것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역사적 중흥'이란 신념을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열일을 했다.

애국심에 불타 올라, 자기 건강도 못 챙기면서 '정언명령'을 따랐다.

독일민족 구성원 개개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했다.


같은 이야기를, 그의 대척점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인민의 해방이라는 고귀한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던졌다.

그 와중에 다른 이들의 목숨이 위해를 받는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양쪽 모두, 결과가 어떠했는가.

이런 역사적 비극을 과연, 타협이라는 정치인의 기술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


2차 대전 직전,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의 요구에 '타협'했다.

나는 베버의 '타협'보다 벤담의 '계산', 즉 결과값 예측이 더 유효한 수단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법은 따르는 진보주의자가 지식인으로 활동할 때는 큰 문제가 없다. 오로지 다른 사람과 논쟁할 뿐이어서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정치에 뛰어들어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으려 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281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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