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하는 이기적 유전자

[책을 읽고] 리처드 도킨스, <확장된 표현형> (11)

by 히말

개체간 경쟁과 표현형


댐을 짓는 여러 마리의 비버가 댐의 높이에 대해 다른 생각(유전자)을 가지고 있다면,

댐의 높이는 결국 이들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예컨대 평균으로) 결정된다.


달팽이에 기생하는 흡충 중에는 달팽이의 껍질을 두껍게 하는 종류가 있다.

두꺼운 껍질은 달팽이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지고 유지 비용도 더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껍질에 의해 보호받는 흡충에게는 두꺼울수록 더 좋다.


결국 달팽이 껍질의 두께는 다른 이해관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댐 높이가 다른 비버들의 유전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다.


이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침은 물론,

두 개체가 같은 종조차 아닌 경우를 보여준다.


이 경우 달팽이는 다소 얇은 껍질을, 흡충은 두꺼운 껍질을 선호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도킨스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 즉 껍질 두께 결정 함수의 복합성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한 지역에 사는 달팽이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확률로 흡충에 감염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세대가 지남에 따라 달팽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얇은 껍질을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물건 값을 후려칠 것 같은 고객에게 처음부터 더 높은 값을 부르는 상인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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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들


책에 소개된 또 하나의 놀라운 사례는 식물에 발생하는 '근두암종'에 관한 것이다.

이 암은 어떤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하는데,

암에 걸린 식물은 자신에게 쓸모없는 오파인이라는 물질을 대량으로 합성한다.


오파인은 박테리아에게 유용한 물질이다.

여기까지 보면, 박테리아가 기생 식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대일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박테리아는 Ti 플라스미드에 감염된 경우에만 식물에 암을 일으킨다.

즉 식물을 감염시키는 주체는 박테리아라는 생명체(개체)가 아니라 플라스미드, 즉 유전자 조각이다.


이 사례야말로, 유전자 수준에게 '이기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플라스미드는 식물로 옮겨가는 순간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식물과 함께 사멸하고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박테리아 개체들에 널리 퍼져있는 자신의 사본을 번창하게 할 수 있다.

식물에게 오파인을 대량 합성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이 요점이 내놓는 필연적 결과는 개체 행동은 언제나 자신의 유전적 복지를 최대화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체는 다른 누군가, 이 경우 자기 안에 탄 기생자 유전자의 복지를 최대화한다. 다음 장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개체가 지닌 자질 중 일부는 반드시 기생자일 필요가 없는, 다른 개체에 있는 유전자가 내는 표현형 발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논할 것이다. (12장 중에서)


예컨대 광견병에 걸린 개는 아무나 물어버린다.

이 행동은 개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광견병 바이러스에게는 매우 도움이 된다.



미토콘드리아


미토콘드리아가 별도의 유전자 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미토콘드리아는 엽록체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개체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말로 유명해진 것처럼,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모계로만 전해진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머물고 있는 개체가 아들을 낳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사건이다.


식물에게 옮겨간 플라스미드에게 그 식물의 몸이 막다른 길인 것처럼,

수컷의 몸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게 막다른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풀은 지금도 핵 유전자 풀과 전쟁 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토콘드리아 DNA가 포유류 난자에 표현형 효과를 행사할 수 있다면, 나중에 파멸을 가져올 Y 염색체를 가진 정자와 미친 듯이 싸우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도 그저 공상만은 아닐 것이다. (12장 중에서)


플라스미드나 미토콘드리아는 그야말로 유전자 단위의 극단까지 간 사례다.

그러나 유전자 조각이 꼭 그 생물의 몸에 기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뻐꾸기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뻐꾸기 유전자는 개똥지빠귀라는 개체의 행동을 조종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뻐꾸기 몸은커녕, 뻐꾸기에 기생하는 어떤 다른 생물의 몸에 기생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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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바로 이런 원격 작용에 대해 알아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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