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블레어다.
집 근처 강 이름에, 흔한 이름이라는 조지를 붙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조지 엘리엇도 필명을 조지라고 했다.
매거릿 애투드는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가 화자인 <Gertrude Talks Back>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그녀는 아들 이름을 '햄'릿이라고 하면 아들이 학교에서 돼지라고 놀림받을 게 확실했다면서,
아들 이름을 그냥 조지 정도로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왜 덴마크 사람에게 조지라는 이름을 주려고 했는지는 캐나다인인 매거릿에게 물어보자.)
이쯤 되면, 조지라는 이름은 영국인들에게 과연 친근한 이름인가 보다.
(아무래도 용을 죽였다는 성 조지의 영향 아닐까.)
미국의 어느 술집에서 일어났던, 오웰과 헤밍웨이의 만남은 유명하다.
오웰이 헤밍웨이에게 다가가서, "반갑습니다. 저는 에릭 블레어라고 합니다"라고 말하니
헤밍웨이가 퉁명스럽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대답했다.
오웰이 "조지 오웰이라고도 부르죠"라고 덧붙이자, 헤밍웨이가 급반색했다는 일화다.
아무튼, 이름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내가 읽은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은 학창시절에 읽지 않을 수 없는 작가다.
소련이라는 '악의 제국'이 존재할 당시에는 반공 필독서였고,
그 나라가 사라진 다음에도 너무 재미있어서 안 읽기 어렵다.
<1984>와 <동물농장>은 거의 같은 주제(전체주의)를 다루지만,
소설이라는 점을 빼면 공통점이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순전히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동물농장>이 더 빼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1984> 곳곳에 드러나는 그의 예언적 풍모를 보면
이 작품을 한 수 아래라고 평하는 일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두 권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었고,
대학 시절, <런던과 파리에서 바닥 생활>을 만났다.
오웰을 반공 작가 정도로 알던 내게, 이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추천해 준 사람은 '조지' 시드니 교수였다.)
이후, 오웰의 수많은 수필 작품을 만나면서, 오웰의 진면목은 소설보다 산문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을 다룬 산문이나, 그의 인도 시절을 다룬 산문, 그리고 무엇보다, 2차 대전 그 한가운데서
전체주의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던 그의 목소리는 빛 그 자체였다.
위건 부두
위건 부두는 탄광촌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지저분한 작은 항구였다.
지금은 이 책 덕분에 관광지로 복원되어 있지만,
조지 오웰이 탄광촌에 탐사 취재를 갔을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항구였다.
이 책의 1부는 <파리와 런던의 바닥생활>의 1부와 비슷하다.
오웰 특유의 블랙 유머가 곁들여진 탄광촌 취재 내용이다.
첫 장은 탄광이나 광부 이야기가 아니라, 하숙집 이야기다.
<레미제라블>이나 19세기 러시아 소설에서 보던, 가난한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하숙집 주인도 알고 보면 가진 재산 다 털어 하숙집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보려는 할머니일 뿐이지만,
약자들이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오웰은 가감없이 그려낸다.
어느날, 아침 식사 테이블 바로 아래에 놓인 꽉 찬 요강을 보고 난 뒤, 오웰은 하숙집을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본격적인 탄광, 그리고 광부들의 이야기는 그 다음에 이어진다.
<제르미날>과 같은 소설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탄광 노동의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다.
(물론 <제르미날>의 아동 노동은 없다.)
실제 작업 시간, 즉 보수가 주어지는 시간은 하루 7.5시간이지만,
작업 공간까지 도달하기 위해 높이가 1.5미터에 불과한 갱도를 평균 1.5km 오가는 시간은 통근시간의 일부일 뿐이다.
오웰의 키는 190cm였으니, 취재라고 해도 얼마나 고달팠을까.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2장)
노동자들의 삶
3장은 광부 노동자들의 생계, 4장은 그 핵심인 주택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거의 100년 전인 이 때에도 문제의 핵심은 주택이었다는 게 놀랍다.
(땅은 언제나 모자라나 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당시에도 <노마드랜드>에 나오는 간이 주택 생활자들이 많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바퀴와 말을 제거한 마차(캐러밴)에서 생활했는데,
경악스러운 점은 그게 공짜라 아니라는 것이다.
캐러밴 거주자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반 주택 못지않은 집세를 내고 있다. 나는 한 주에 5실링 이하를 낸다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으며(6세제곱미터의 공간에 5실링이라니!) 집세가 10실링이나 된다는 경우도 있었다. (4장)
그럼에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값싼 사치'에 취해, 그것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확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논리를 들먹이며,
오웰은 '저가 의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후에 값싼 사치가 발달한 것은 우리의 통치자들에겐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피시 앤드 칩스’, 인조견 스타킹, 연어 통조림, 할인 초콜릿(6페니에 2온스짜리 초콜릿 바가 다섯 개), 영화, 라디오, 진한 차, 축구 도박 같은 것들이 혁명을 막은 게 사실인지도 모른다. (5장)
이어지는 2부는, 또다시 <파리와 런던의 바닥생활>의 2부와 흡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이며, 무엇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오웰 자신이 문필가를 넘어서 사상가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