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박사님, 실망했습니다

[책을 읽고] 브라이언 그린, <시간의 끝> (1)

by 히말

애독자의 분노


(적어도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는) 초끈이론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브라이언 그린의 이 책은

시간의 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종말에 대해서 다룬다.

(원제는 '시간의 끝까지'지만, 실제로 시간의 시작과 경과보다는 끝에 주안점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선 이 글에서는 의식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기로 한다.


미리 약간 스포를 하자면, 나는 브라이언 그린 씩이나 되는 대학자가

의식의 문제에 대해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논의 주제는 이것이다. "의식이란 과연 차머스가 말하는 어려운 문제인가?"

(이런 주제로 브라이언 그린을 반박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2e822e912acaad3121ecf9885cf3c35e6cecb998-3000x2595.jpg Brian Greene (photo credit: Michael Avedon)


포기하고 싶은 환원주의자


하버마스가 말하는 똘레랑스가 흘러넘쳐서인지는 몰라도,

세상에는 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지구평평설이나 달뒷면외계기지설 같은 위대한 이야기들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존 설이 주장한 허접한 논증인 '중국어 방'은, 적어도 네메시스 가설 급은 되어 보이는 괴설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한층 더 한심한 주장을 펼친 이가 바로 데이비드 차머스다.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부분은 쉬운 문제다.

환원되지 못하는 부분은 어려운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머스는 그저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환원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진화과학을 거부하는 이들과 같은 부류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조소를 받을테니, 이런 애처로운 돌림말을 쓴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자이기도 하지만,

환원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물리학이나 철학(인식론)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


물리학자나 인식론 철학자란, 그 정의가 '세상을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인식론자는 요리하기를 거부하는 요리사와 같다. 어불성설이다.


'환원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저자가 책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하는 일을 넘어서 마음이 느끼는 감각을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과학으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들이 말하는 '어려운 문제'다. (183쪽)


과학자가 여가 시간에 무얼 하든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다.

윤회에 관한 소설을 쓰든, 공중부양 연습을 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물리학자가 윤회나 공중부양을 믿는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다.


환원주의자라 자처하는 저자가

'전통적인 과학으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숙제를 적당한 수준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모른체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어려운 문제'라고 이름붙인 차머스의 착각은

프랭크 잭슨이 만들어낸 비유, '색채학자 매리'에서 절정을 이룬다.

브라이언 그린을 속여넘긴 차머스와 마찬가지로, 잭슨도 이 비유로 많은 수의 소위 '학자'들을 속여 넘겼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분명한 결론을 내리는 문장을 회피한다.

그래서 다른 많은 문제들(예컨대 시간의 끝이나 볼츠만 두뇌)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결론을 회피한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가 존재한다는 견해는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소위 환원주의자가 '어려운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는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보다는

태엽장치 세계를 믿는 라플라스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2019-09-09-Q1.jpg 네메시스 가설이 훨씬 설득력 있다 (출처: https://sky-lights.org/2019/09/09/qa-nemesis/)



논증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논증


존 설의 '중국어 방' 비유를 처음 접했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게 중국어를 이해하는 거지. 중국어 방에 갇혀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중국어 방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 뇌의 일부, 예컨대 편도체에 언어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내 뇌 전체가 언어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중에 대니얼 데닛이 중국어 방 '논증'을 대차게 까는 걸 보고,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나는 중국어 방보다 어쩌면 더 멍청한 두 개의 비유,

즉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와 잭슨의 '색채학자 매리'를 만나고 말았다.


데닛은 물론 이 두 개의 '논증'도 대차게 까버린다.

데닛의 반박을 보기도 전에 이미 나도 내 나름대로 이 두 개의 나이브한 '논증'을 나름대로 반박했고,

데닛의 반박 논리는 내 것과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첫째,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환원주의의 설명 이후에 남는 잔여물은 없다.

인류가 가진 현재 수준의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은,

후세의 인류(또는 어떤 다른 지적 존재)가 설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직 숙제를 다 하지 못한 것일 뿐,

숙제 자체에 해결 불가능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잭슨의 색채학자 매리는 시력 회복 수술을 받고 세상을 처음 봐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이미 그녀는 다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색채학자로서 모든 색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은 경험적 반응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색채학자 매리에 관한 덧말


나는 이 글에서 프랭크 잭슨만은 까지 않았는데, 그가 나중에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철회 이유도 내가 말한 바와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색채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색채학자 매리' 비유로 이미 유명할 만큼 유명해진 그가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해서 말하는 대로, 과학이란 잘못을 인정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색채학자 매리'에 대해 부가 설명을 하고 싶게 만든 것은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책 'Incognito'다.


이 책에는 혀의 미뢰에서 감각한 정보를 뇌의 시각중추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혀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초음파를 통해 복잡하고 좁은 동굴을 날아다니는 박쥐를 놀라워 한다.

박쥐가 되는 느낌은 어떨까 궁금해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별로 색다른 경험이 아니다.


박쥐는 초음파의 반향음을 듣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산하여 벽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세상을 '본다.'

우리 뇌가 맹점과 시각 주변부의 이미지를 계산해서 그려내듯,

혀 수술을 받은 사람과 박쥐의 뇌는 미뢰와 귀로 들어온 정보를 반영해

'그림(내지 동영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회복한 시력으로 세상을 처음 마주한 색채학자 매리가 아니라,

색채학자 매리의 색에 대한 이해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워해야 하는 것이다.


bats_1798644i.jpg photo credit: Rex Features


책은 좋았다


의식에 관한 장(chapter)을 제외하면 이 책은 아주 괜찮았다.

시간의 끝에 대한 두 개의 챕터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프리먼 다이슨의 '영원한 사고체(thinker)' 논의를 에너지 입력이 아닌

폐열 방출(즉, 엔트로피)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단연 최고였다.

같은 사실이라도, 관점을 다시해서 보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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