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덩어리와의 랩 배틀

[책을 읽고] 울프 다니엘손, <세계 그 자체> (2)

by 히말

지난 글에서는 저자와 동감한 부분이 (그나마) 많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충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니 읽기 전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컴퓨터의 영혼


영혼이 몸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믿던 데카르트는 말년에 스웨덴에 살았는데,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 몸과 함께 영혼도 죽고 말았다.


레이 커즈와일식의 불멸이 아니더라도, 컴퓨터에 뇌를 업로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뇌 과학의 발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쪽에 점점 증거를 누적하고 있다.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라는 제목의 5장은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거슬리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장에서 대니얼 데닛의 주장, 즉 의식의 창발에 대해 반대 의견을 열렬하게 개진한다.

(데닛 '일당'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데, 존재감은 없겠지만 나도 그 일당에 포함된다.)


데닛에 따르면 정보 처리 시스템이 충분히 복잡해지면 의식이 창발한다.

내게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의식이란 결국 재귀적 감각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면, 어느 수준 이상의 복잡한 생각, 즉 정보 처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데닛 일당의 주장이 허튼 소리라 치부하면서,

의식의 관여 없이 계산을 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란다.


데닛 일당이 하려는 일은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5장)


솔직히 말해, 너무 허접한 반론이라 반박할 가치를 못 느끼지만, (나도 그 일당이니) 반박하겠다.

의식의 관여 없이 계산을 하는 방법으로 저자는 컴퓨터를 들고 있지만, 컴퓨터는 인간이 개입해야 계산을 수행한다.


저자가 생각지도 못한 듯 보이는 더욱 간단한 계산 도구, 즉 주판이나 계산기도 인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주판은 구슬을 꿰어놓은 나무 막대에 불과하다.

인간이 개입하면, 그냥 돌멩이들도 계산에 동원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의식의 관여 없이 계산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명제가 데닛의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데닛은 '모든' 계산이 의식을 창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충분히 복잡한 계산이어야 한다.

(예컨대, 충분히 복잡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데 성공한 존 설의 중국어 방 같은 것 말이다.)


image_8796647011514515047148.png


도킨스가 된 기분이다


다음 장인 6장에 이르고 나니, 나는 마치 창조론을 반박해야 하는 도킨스가 된 기분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반박해야 하는 짐의 무게는, 가소로운 동시에 매우 무겁다.


모든 점에서 인간과 똑같지만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좀비라고 불리는 존재가 인간과 다르며,

그냥 만나 보기만 해도 좀비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저자에게 더는 할 말이 없다.


'모든 점에서 인간과 똑같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으니,

같은 언어를 다른 의미로 쓰는 사람과 어떻게 소통을 한단 말인가?

(단편소설 '책상은 책상이다'가 떠오른다.)


존 설이나 차머스 같은 '저자 일당'이 존재하므로, 이 글에서 그들의 색다른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겠다.

(이미 다른 글에서 수없이 했다.)


다만, 저자는 '자의식이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제1명제가 증명이 필요없는 공리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다양한 무리수의 기반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환각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주관성과 의식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5장)


저자는 저 자의식('주관성과 의식')을 '영혼'이라고 부르고 싶어 애가 타고 있을 것이다.

(차머스와 같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과학적 증거(예컨대 뇌과학 실험 데이터)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를 과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contributor-richard-dawkins.jpg


영혼을 믿고 싶은 과학자


생명이든 의식이든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6장)


생명과 비생명의 구별은 명약관화, 그냥 보면 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독자인 내게, 그는 일단 생명과 비생명을 임의적으로 구별해 놓은 다음,

자신의 구별을 강요하려고 억지를 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라면, 생명과 비생명을 구별하는 기준에 대해 과학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그 기준을 임의적으로 정한 다음에 논증하려고 애쓰는 대신에 말이다.


생명은 기계와 달리 절대로 닫힌 계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이어 말한다.

그러나 기계는 과연 닫힌 계가 될 수 있는가?


저자가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진정으로 닫힌 계는 오직 모형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모형과 실재가 다르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란 말이다.



창발되는 물리법칙


에릭 호엘Erik Hoel은 한 수준에서의 인과적 구조가 하위 수준에서의 인과적 구조로부터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한다. 생물학과 심리학에는 나름의 법칙들이 있으며 미시적 세부 사항에 개의치 않는 채 물리학 위를 배회한다. 상위 차원에는 하위 차원보다 더 많은 정보가 들어 있으며, 소립자물리학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인과적 구조가 있다. 호엘은 정확한 수학적 논증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6장)


또, 이런다.

교양과학서에 '정확한 수학적 논증'을 게재하게 될 일은 없다.

따라서 이 주장은, 또다시 근거 없이 하고 싶은 주장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Gemini와 ChatGPT에게 이 주장의 검토를 부탁했다.

정말로 에릭 호엘이 정확한 수학적 논증을 했는지 물었다.


AI의 대답은, 에릭 호엘의 '논증'이 일관적이기는 하다는 것이다.

즉, 내부적 정합성은 있다.

그러나 내부적 정합성이 확고하지만 세계의 진실과 상반되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Coherence Theory of Truth의 태생적 맹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릭 호엘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다음 논증도 진실이다.


우리집 강아지는 인간이다. 인간은 말을 한다. 따라서 우리집 강아지는 말을 한다.


이 논증은 3단 논법을 아주 충실하게 따르는 논증으로, 완전한 내적 정합성을 가진다.

하지만 우리집 강아지는 인간이 아니다.

세계의 진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적으로만 일관된 이야기일 뿐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생략했지만, 이 부분에서 저자는 '강한 창발'과 '약한 창발'을 구별해야 한다는,

본질적으로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으로 소급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세계의 밑바닥에서 법칙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 수 있다면 강한 창발이 작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즉, 당신의 손에 있는 원자들이 더 큰 척도에서의 복잡한 현상들에 반응하며 움직인다면 낱낱의 원자를 지배하는 법칙은 미시적 수준에서 온전히 결정될 수 없다. (6장)


반박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지만, 굳이 반박하자면,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도에서 그런 가능성은 없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모두 설명 가능하고, 그 이상 어느 단계에서도 상위 수준은 하위 수준으로 환원 가능하다.


저자는 상위 차원의 소급 효과가 필요한 설명으로 닫힌 계와 열린 계를 설명한다.

세계(실재)는 열린 계인데, 그것을 설명하는 모형은 언제나 닫힌 계이므로,

그 차이를 덮어 씌우기 위한 플러스 알파, 즉 거시적 차원의 부가 설명이 필요하며,

바로 그것이 상위 차원의 소급 효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게는 현대 물리학의 한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노력하고 있다.


나는 물리학자일지는 몰라도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물리학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6장)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물리학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다.


아쉽지만, 인류는 그 전에 소멸할 것 같다.


Dennett-and-Vat-700x420.jpg


바이오센트리즘


7장 제목은 반어법인지,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다.

그런데 이게 사실 반어법이 아닌 것이,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특별함이 아니라 영혼의 특별함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다른 동물들에게도 있다고 하면 된다.


구달은 인간의 감정을 인간 아닌 다른 동물에게 투사하고 침팬지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과학적 방법을 왜곡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과학의 초연한 3인칭적 시점이 다른 존재의 주관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연구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구달이 한 일은 우리의 내면 세계가 침팬지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과학적 가설을 검증한 것이었다. (7장)


구달의 방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저자의 의도는 별론으로 하고,

나는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방법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전인수의 달인인 저자가 사심이 없을 리가 없다.

'의식을 정의하는 것은 말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움직이는 능력이다'라는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언어보다 훨씬 먼저 존재하는 의식에 대한 그의 단언은 또 한 번 크게 거슬린다.


나는 그런 자아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언어를 흔적조차 없이 잃어버렸어도 여전히 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7장)


어떤 환각제 중독자는 자기 왼손에서 흑염룡이 불을 뿜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진실은 아니다.

상상할 수 있다고 진실이라니,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도 진실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언어와 의식의 관계에 대해 나는 아직 별다른 확신이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있던 존재의 의식이 언어가 사라진 다음에 비슷한 모습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이 대목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말하는 그의 뻔뻔한 태도다.


maxresdefault (1).jpg


수조 속의 뇌


이어, 그는 볼츠만 두뇌, 즉 '수조 속의 뇌'를 반박(?)한다.


당신이 정말로 수조 속의 뇌라면(그리고 다른 경험을 한 번도 접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뇌가 무엇인지, 수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관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면 수조 속의 뇌는 모순이다. (7장)


우리가 수조 속의 뇌라면, 수조가 무엇이고 뇌가 무엇인지 당연하게 매우 잘 알 것이다.

프로그램된 대로 이해할 것이니까 당연하다.


관념이 실재와 어떻게도 연결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면, 수조 속의 뇌는 모순이 맞다.

그러나 수조 속의 뇌라는 퍼즐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뇌가 실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보라.)


정말 논박해야 하는 대상 대신, 허접한 유사물을 세워 놓고 반박하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의 오류다.

억지 주장을 하는 사람과의 토론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책을 읽으며 수도 없이 경험했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잘 쓰여진 추천사 때문이었다.

추천사를 쓴 과학자는, 저자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언어적 오류라고 지적한다고 말한다.

매우 그럴듯한 논점이지만,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었듯, 이런 주장은 말만 그럴 듯한 빈 껍데기인 경우가 많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그 기원을 지목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지목할지보다는 어떻게 정의하는지와 관련 있다. (8장)


자유의지 뿐 아니라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이는 매우 마땅한 주장이다.

다만, 저자가 이런 문장을 서두에 놓는 이유는 뻔하다.

논점을 '재정의함'으로써 억지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다.

(명절 때 고향집에 가서 '취직은 언제하냐'라는 말을 들으면 '취직이란 무엇인가'라고 대꾸하라는 철학자 김영민의 명언이 생각난다.)


허술한 논리적 연계성(그런 것이 있다면)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저자는 통찰력 있는 주장을 편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개념의 대립이, 모형과 실재의 혼돈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즉, 모형은 결정론적이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감탄한다.


우리는 자연법칙의 노예가 아니다. 자연법칙은 우리 자신을 비롯해 자연이 하는 일을 기술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8장)


다시 말해, 이 문제에 관한 저자의 결론은,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으니 치워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박하고 싶다.

그런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철학이고,

당장은 쓸데없어 보이는 철학이 인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모든 학문을 만들어냈다.


9788962625738 (2).jpg


소결


이렇게 마음에 안 들면서도 5점 만점을 줄 수밖에 없는 책을 만나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아주 강력(?)한 논쟁 상대를 만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한 과학자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과학을 재검토하고,

(저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심지어 방어할 수 있었다.


맨날 뇌 빼고 하는 게임만 하다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정신적 암벽 등반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철학, 특히 인식론을 내가 최애하는 이유가 그거다.)


매거진의 이전글수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