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의식이라는 꿈> (2)
아무나 가져다 쓰는 힙한 단어, 감각질
나는 감각질(quale, qualia)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단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없는 존재에 대한 단어는 무수하게 많고, 그들 중 다수를 나는 좋아한다.
내가 감각질이란 단어에 학을 떼는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단어를 가져다 쓰는 사람들 때문이다.
예컨대 플로지스톤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과거에 과학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했는지 설명할 때 (사실은 비웃을 때) 사용한다.
그러나 감각질이라는 개념은 아직 충분히 반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이 단어를 가져다 쓸 경우, 얼떨결에 이 개념을 인증하는 셈이 된다.
예컨대 최근에 읽은 <디어 올리버>에서 수전 배리가 그렇게 사용했다.
사람들은 (나도 마찬가지다) 천성적으로 잘 모르는 개념에 대해 아는 척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를 그냥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은데, 수전 배리가 딱 그 사례다.
물론 수전 배리의 전공 분야는 인식론이 아니다.
하지만 학자라면, 그 개념에 대해 충분히 공부를 하고 나서 책임감 있게 그 표현을 써야 했다고 나는 믿는다.
수전 배리와 전공 분야가 대단히 유사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오페라 가수와 노래 좀 하는 동네 아저씨를 비교하는 꼴이니, 공정하지 않다.)
어쨌든, 감각질이란 개념이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시키고 있는 만큼,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인식론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다.
감각질이란 무엇인가
감각질이란 오해가 탄생한 배경에는 칸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칸트는 물자체와 현상계를 분리했으며, 이는 현대 과학의 진전을 가져온 아주 중요한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현상학이 유래했으며, 모두가 좋아하는 실존주의가 현상학의 아이로 태어났다.)
칸트는 예컨대 수학을 우리가 이해하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우리 내부에 수학 원리에 대한 이해 내지 내부적 구조가 이미 존재하여,
그것이 현상학적 관찰과 대응되는 방식으로 그 이해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식론에서 절대 진리로 간주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가 수학인데,
그 이유는 수학이 동어반복(tautology), 즉 우리가 정의한 방식대로 풀어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1+1이 2인 이유는, 우리가 2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현상학적으로 인식된 세계가 우리 내부의 구조와 조응하는 경우를 이런 경우,
즉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지식에 한정했다.
감각질은, 관찰 결과를 귀납적으로 해석하는, 즉 수학이나 논리학과 전혀 다른 성질의 학문인 자연과학에
칸트의 '내부 구조'를 대응시킨 결과다.
다시 말해, 칸트를 오해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빨간색 사과와 빨간색 자동차를 보고 둘 다 빨간색이라고 감각하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 내부의 인식 체계에 '빨간색'이라는 감각질이 있고,
사과와 자동차의 색깔이 바로 이 빨간색 감각질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멋진 설명인가!
그런데 정말 멋진가?
감각질이 사실이라면, 갓난아기는 빨간 사과와 빨간 자동차를 처음 보는 순간, 그들이 같은 속성,
즉 빨간색이라는 감각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사실, 우리가 빨간색을 인식하는 방식은 훨씬 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 어떤 물건들에 대해 사람들이 '빨갛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우리는 반복해서 경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다음번에 빨간색 물체를 볼 때, 그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연관시키는 것뿐이다.
즉, 빨간색이란 개념은 언어 현상이다.
이는 데닛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으로,
그는 인간의 의식이 언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사실 위의 설명은 데닛의 설명이 아니라 내 설명이다.
데닛은 나보다 훨씬 친절하기 때문에, 감각질이란 개념이 왜 잘못되었고 왜 필요 없는지 세세하게 설명한다.
데닛의 요지는, 감각질이라는 중간 단계가 없어도 인식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 작용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할 때, 감각질이라는 개념은 잉여적이다.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과학적 태도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감각질이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관찰 가능하지 않은데,
좀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좀비감'(내지는 그들이 남몰래 사모하는 '영혼')과 마찬가지다.
변화맹과 감각질
사람들에게 모든 부분이 똑같고 서랍장 한 칸만 색이 다른 두 부엌 사진을 보여주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다시 보여줘도 대개 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한다.
책 150쪽에 실려 있으니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일단 알게 되고 난 다음에는 대체 왜 이게 안 보였나 하고 의아할 정도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데닛은 묻는다.
당신이 아직 그 차이를 알아채기 전에, 두 사진을 보는 경험에서 감각질이 달랐는가?
두 사진에는 분명한 색깔 차이가 있으므로, 감각질이 달랐다고 대답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알아채지 못했는가?
감각질이란 당신만이 오직 일인칭으로만 접근 가능한 배타적인 인식인데 말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감각질이 다르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는, 당신 내부의 감각질이 현상적 입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즉, 감각질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감각질이 변한다고 생각할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변한다는 주장을 고수한다면 당신은 좀비가 감각질을 결여한다는 생각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154쪽)
좀비라면, 인간과 행동은 똑같지만 감각질이 없으므로 두 사진이 다르다는 것을 못 알아챈다.
그런데, 방금 전 인간인 당신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감각질은 (영혼처럼) 좀비는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은 가진 것이라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이 현상(변화맹)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훨씬 간단한 개념으로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당신의 무의식(예컨대 변연계)은 그 차이를 알았지만, 당신의 의식은 그 차이에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두 사진의 색깔 차이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걸 놓쳤을 리가 없다. 당신의 조상들은 모두 그 색깔 차이를 알아챈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데닛은 안면실인증과 카프그라스 망상의 사례로 감각질 논의를 이어간다.
안면실인증은 시각과 지각에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사람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며,
카프그라스 망상은 시각이나 지각적으로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증상이다. (나는 바디스내처 증후군이라 부르고 싶다.)
다시 말해, 안면실인증은 감각질에 이상이 있는 것이고,
카프그라스 망상은 감각질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역시, 그냥 의식과 무의식으로 설명하면 훨씬 깔끔하다.
안면실인증은 의식 수준에서 사람들을 못 알아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 알아보는 것이고,
카프그라스 망상은 무의식 수준에서 사람을 인식하지만, 의식 수준에서 거부하는 것이다.
소결
감각질에 관한 제4장은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잉여롭고, 솔직히 말해 시원하지도 않다.
나는 그 이유가, 감각질이라는 개념에 대해 합의된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정의조차 되지 않은 개념이 틀렸음을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하는 데닛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감각질 부정이) 어려운 주된 이유는 '그 용어의 이러한 표준적이고 넓은 의미'라는 것이 검토되지 않은 전제들과 순환적으로 정의된 세부 내용들이 공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144쪽)
철학자들은 기술적 용어를 정의하는 과제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는 안일한 가정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178쪽)
우리는 이미 이 게임을 본 적이 있다.
과학이 신 없음을 증명하자,
유신론자들은 신이 그게 아니고 뭔가 다른 것이라는 식으로 계속 말 바꾸기를 해왔다.
감각질이란 모호한 단어에 대해서도, 바로 그 게임이 계속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