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로 부족하다면
로보메리는 어떤가

[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의식이라는 꿈> (3)

by 히말

당연하다


그 유명한 프랭크 잭슨의 색채학자 메리 논증은 실제로 이렇게 쓰여 있다.


(전략)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녀는 뭔가를 배울까 배우지 않을까? 그녀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 경험에 관해 뭔가를 배우리라는 것은 그저 당연해 보인다. (잭슨, 1982, 데닛 182쪽에서 재인용)


솔직히 나는 나중에 자기 잘못을 깨닫고 주장을 철회한 잭슨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의 그를 포함한 좀비주의자들의 소위 논증이라는 것이 매번 이런 식이라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논증은 필요 없고, 어떤 결론은 그저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네이글은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논증보다 직관을 더 신뢰해야 한다고 믿는다. 만약 논증이나 이론적 고려가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논증이 뭔가 잘못된 것이며 추가적인 작업이 행해져야 한다. (네이글, 데닛 58쪽 각주에서 재인용)


직관적으로는 지구가 가만히 있고 태양이 주위를 도는 것으로 보이니,

관찰이나 실험 결과가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더라도 무시하고

직관적으로 당연한 천동설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를 학자라고 말해야 한다면, 학자라는 단어는 욕설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들 잘 알다시피 중세 교회 권력에는 이런 자들이 아주 많았다. 네이글은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07NAGEL-superJumbo.jpg 중세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킬 카운터가 아주 높은) 종교재판관이 되었을 텐데, 통탄할 일이다


로보메리


호프스태터는 사고 실험의 정확성을 시험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이리저리 돌려 보라고 조언한다.

그 조언에 따라, 데닛은 색채학자 메리를 여러 가지로 변형해 보는데, 그 결과가 '늪지 메리'와 '로보메리'다.


늪지 메리는, 색채학자 메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풀려나는 순간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신경망 배열이 '빨간색을 보고 난 이후의' 상태로 재배열된 경우다.


로보메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경망 배열 상태를 프로그램할 수 있는 사이보그다.

우리는 그녀의 신경망 배열을 '빨간색을 보고 난 이후의' 상태로 프로그램할 수 있다.

(데닛의 실제 설명은 훨씬 더 단계적이고 친절하니, 직접 음미해 보기를 권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주지 않아도,

신경망의 물리적 반응까지 포함하는, 색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메리에게

'실제로' 빨간색을 처음 목도할 경우에 "새로운" 경험이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시나리오를 올바로 상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따라서 그들은 더 상상하기 쉬운 뭔가를 상상하고, 그렇게 오인된 근거로부터 결론을 끌어낸다. (183쪽)


사람들은 사고 실험을 굉장히 편리하게 대하고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린다. (그저 당연해 보이니까.)

그러나 데닛이 <직관 펌프>에서 사례로 드는 것처럼 사고 실험은 대단히 어렵다.

천각형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가? 백각형은?

난 십각형도 잘 못 그리겠다.


그러나 우리는 천각형이란 개념을 이해한 것만으로, 마음속에서 상상했다고 착각한다.


데닛은 네이글, 설, 차머스 같은 우둔한 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다이얼을 한 칸씩 돌려주며 설명한다.

로보메리쯤 되면 너무 분명하지 않은가?

실험자는 로보메리의 신경망 배열 상태를 빨간색을 충분히 경험한 이후의 상태로 그저 세팅할 수 있다.

이렇게 세팅된 메리가 직접 빨간색을 본다고 뭘 배우겠는가?


Regular_polygon_100.svg.png 백각형만 돼도 이 수준이다 - 이걸 머릿속에서 한 변 한 변 그릴 수 있다고?


찢어진 과자 상자


사고 실험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탁월한 비유로서

데닛의 전작,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 나오는 'M탐지기'를 소개하고 싶다.


M탐지기는 실제로 구소련 시절 미국에서 활동하던 스파이들이 쓰던 접선 방법이다.

거의 절대로 파훼할 수 없는 이 비법은 실로 간단하다.

두 사람이 과자 상자 하나를 반으로 '찢어' 나눠 갖고, 접선 때 서로 맞춰 보는 것이다.


그들은 젤리 과자인 젤로(Jell-O) 상자를 둘로 잘라 서로의 신분을 확실히 확인해야 할 두 사람에게 하나씩 주었다. 각각의 조각은 자기 짝을 찾아낼 수 있는 틀림없고 독특한 방법이었다. (데닛,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11장)


찢어진 조각의 반대 조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적어도 '사고 실험'에서는 말이다.


구 소련 시절 과학기술 수준에서는 불가능했겠지만,

지금 수준의 과학기술에서는 찢어진 한쪽 과자 상자의 반대편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제법 가능할 것 같다.

지금 가능하지 않더라도 미래에는 가능할 것이다.

상상의 날개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고 실험에서도 물론 가능하다.


색채학자 메리가 색채 경험을 배제한 상태로 색채에 관한 모든 물리 현상을 배우는 것은,

당연히 현재 과학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중에 실제로 색깔을 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거라는 아둔한 상상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그냥 상상력 빈곤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이 아둔한 생각의 정점에 있는 것이,

의식에는 뭔가 과학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비밀이 있을 거라고 단언하는,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다.


fc30155b-cc00-44e4-a6ff-0cc16dd720f8.jpg 로젠버그 부부가 실제로 사용했던 젤로 박스 - 생각보다 찢어진 면이 단순해서 놀랐다 (c) National Archives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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