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이탈리아의 화학자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된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이름의 책으로 낸다. <휴전>, <주기율표>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분투하던 그는, 그간의 연구를 모아 1986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발표했으나, 그 이듬해 자살하고 만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은 그를 되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거운 주제는 내 마음을 짓눌렀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 심정을 이해하고 싶어 책을 펼쳤다.
제2장 '회색지대'에서 그가 밝히듯, 대다수 인간은 흑도 백도 아니다. 그러나 어디엔가 선은 결국 그어지고 만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라앉고, 누군가는 구조된다. 레비는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마치 자책하듯이.
생존자들 가운데는 포로 생활 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17쪽)
회색지대의 존더코만도
그렇다고 해서, 회색지대에서 가장 빛에 가까웠던 사람들만이 인간다움을 유지한 채 죽고, 가장 어두운 곳에 서 있던 자들만이 검은 악마들과 함께 지옥에서 생환했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 만물이 파동이듯, 우리 인간도 회색지대 안에서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갈 뿐이다.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란 수용소 화장터의 잡무를 맡는 유대인들의 부대다. 그들은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처리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가스실에서 살아 있는 16세 소녀를 발견한 것이다. 존더코만도 부대원들은 그녀를 숨겨주고 먹을 것도 제공했다. 조금 전까지 시체를 마치 장작더미처럼 화로에 던져 넣던 그들이다.
알코올과 일상적인 살육으로 인해 야수가 된 이 노예들은 이제 변했다. 그들 앞에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다. 열차에서 쏟아져 내리는, 놀라고 겁먹은 사람들의 강물 같은 쇄도가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63~64쪽)
존더코만도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들은 시체 처리를 맡으며 단지 몇 개월의 목숨을 연장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샤워실'에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안다. 온갖 헛소문에 휘둘려 희망에 들뜰 기회라도 있는 수용소의 다른 사람들과는 또 다른 처지다. 이것이 과연 더 나은 처지일까? 그렇게라도 몇 개월의 목숨을 더 부지하려는 그들은 과연 뼛속까지 악인일까?
그들도 회색지대 안에서 양지와 음지를 번갈아 서성이던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어느 순간 서 있던 위치 하나만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다른 순간에 그 사람은 또 다른 위치에 서 있었을 것이다.
또한, 레비가 말하듯, 인간은 결코 타인의 입장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한 소년이 똘망똘망한 눈초리로 물었다고 한다.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저자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했지만, 소년은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수용소의 약도를 그려달라고 한다. 감시탑, 출입문, 철조망, 발전소의 위치를 상세하게 칠판에 그리는 저자. 소년은 몇 초간 그 지도를 살펴보더니,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여기서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한다, 그러면 탐조등이 꺼질 것이고 고압 전류의 철조망에도 전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걱정 없이 나가면 된다, 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192쪽)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악의에 차서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영화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이 말하듯,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쉬운 것이다. 하지만,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회색지대의 보통 독일인
사람들 대부분이 회색지대에 머무르는 것은 단지 수용소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수용소 밖에서도, 사람들 대부분은 회색지대에 머무른다. 묵인하고 침묵하는 보통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 행해진다. 회색지대의 보통사람들이야말로 잔혹 범죄의 가담자이자 공범자다.
제8장 '독일인들의 편지'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독일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가 맨 처음 이야기하는 편지는 T.H.라는 이니셜을 가진 부부에게 온 편지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들 부부가 보낸 편지는 예의도 바르고 사과의 뜻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나와 같은 제3자가 보았을 때뿐이다.
당사자인 레비에게 이들 부부의 편지는 편리한 핑계로 가득 찬 위선 덩어리일 뿐이다. 편지에서 이들 부부는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그의 일당에게 속았으며, '악마의 포로'가 된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레비는 격분에 휩싸여 장문의 답장을 썼다.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아래와 같다.
도움을 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살아온 저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일의 점령 후에도 이탈리아에서는 빈번했던, 그리고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너무나 드물게 행동으로 옮겨진, 억압받는 사람에 대해 연대감을 보여줄 훨씬 덜 위험한 천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21쪽)
히틀러는 정치에 입문했을 때부터 자신의 광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으며, 결코 대중을 속이기 위해 속마음과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 생각을 숨긴 적도, 바꾼 적도 없다. 레비가 말하듯, 히틀러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그의 생각에도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이들 뻔뻔한 부부와 레비가 동의하는 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들과 같은 자들이 '독일 중산층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독일인 부부는 그렇게 침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회색지대가 어떤 색깔로 보이는가는 관찰자가 선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르는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다 히틀러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렸고, 그들은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다가 몇 년 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251~252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아쉽게도, 나는 레비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아우슈비츠에서 어렵게 생환하고서, 그것도 42년이나 지난 후에 해야 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회색지대의 인간들이 거대한 악의 공범자가 되고도 뻔뻔하게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밑바닥이 없는 성악설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간 결과란 말인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레비의 성찰과 깨달음의 깊이가 너무 깊다.
내게 이 책은 올해 읽은 150여 권의 책 중 가장 어려웠다. 그건 결국 레비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타인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이 책의 제목. 레비는 자신을 '남을 가라앉히고 구조된 자'라 자책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생환하지 못했다면 누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우리들이야말로, 그를 가라앉히고 구조된 자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