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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07. 2017

21세기의 고리오 영감

[서평] 고야마 카리코,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2013년 내가 읽었던 책들 중 최고였고,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추천했다. 한 친구는 나와 등산하던 도중 내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구매하기도 했다. 그런데 3년이나 지난 작년 그 친구에게 내가 그 책 읽었냐고 물었더니 아직 안 읽었다는 대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책 두께 때문인가?

<21세기 자본>은 사실 아주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 r이 경제성장률 g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계와 상식을 이용해 보여준 뒤, r > g가 성립하는 한 빈부의 격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빈부격차와 관련해서는 쿠즈네츠의 U자 곡선이라는 나름 통계적인 분석이 과거에 존재했다. 그러나 쿠즈네츠는 역사적 우연으로 인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통계를 찾았을 뿐이라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쿠즈네츠가 통계를 낸 시기가 우연하게도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많이 줄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고도성장기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성장률(g)이 자본수익률(r)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높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자본 축적의 가속도가 완화된 것뿐이다. 세계 경제의 선도국가인 미국과 여타 후발국가들의 경제 격차가 줄어든 지금, 중국조차 더는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률을 꿈꿀 수 없다.

<21세기 자본>은 사실 수식이 필요 없는 책이다. 피케티는 자신의 주장에 논리를 더하기 위해 두 개의 수식을 제시했지만, 책 전체의 논리는 r > g라는 부등식 한 개로 설명이 된다. 하나의 수식은 자본-소득 비 β = s/g라는 것이다.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이다. 즉, 자본은 저축률에 비례하여, 소득은 경제성장률에 비례하여 성장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자본과 소득의 비는 저축률과 경제성장률의 비와 같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수식은 α = rβ로 표현이 된다. 즉, 국민소득에서 자본의 몫이 차지하는 비율은 자본-소득 비 β에 자본수익률 r을 곱한 값과 같다는 말이다. 경제성장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저축률은 크게 변동할 요인이 없으므로, 낮아진 경제성장률은 자본-소득 비를 높인다. 그런데 자본-소득 비가 높아지면 자본수익률 r이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국민소득 대비 자본의 몫인 α가 커진다. 자본은 점점 증가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피케티를 논하는 통찰

만화라는 매체에 대한 선입견을 살짝 접어두고 보면,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21세기 자본>에 대한 서평을 만화로 그린 것이다. 사실 <21세기 자본>을 '만화로 보는' 부분은 대단히 빈약하다. 대개의 경우 <21세기 자본>의 내용은 그냥 해설 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보다 보니, 오히려 그것이 이 책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만화로 진행되는 부분은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던 주인공의 자영업 창업기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경제에 관한 여러 가지 통찰을 배우게 된다. 예컨대 한 사람은 자격증을 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격증이 그냥 장롱 면허로 끝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인공은 친구의 아버지인 경영 컨설턴트에게 두 번에 걸쳐 사업계획서를 검토받는데, 첫 번째 검토에서 그는 주인공의 사업계획이 구멍투성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지적된 문제점을 모두 해결한 두 번째 사업계획서를 본 그는 주인공 사업에 자신이 직접 투자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또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한 아주머니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자신의 오피스텔에 액땜을 하려고 하는 전근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기 때문에 자본 축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명철함도 보인다.

토마 피케티의 가장 큰 고민은 상속으로 인한 자본 축적 불균형의 심화였다. 그래서 그는 세계적 자본 과세라는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을 이미 축적하거나 물려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그런 현실에서 가장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고 있는 요즘 세대다. 그녀는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다. 미래가 불확실한 회사에서 단순 업무를 하고 있다. 쳇바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21세기 자본>보다 빈부격차의 문제를 더 박진감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젊은이의 미래 고민은, 만화 주인공이 직면하고 있는 장래 고민과 다를 것이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들에게 해줄 충고마저 똑같다는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 빈부 격차를 만드는 구조는 여전하다.

아직도 <21세기 자본>을 읽지 않고 있는 그 친구에게 이 책을 보내줘야겠다.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표지 (저작권자 스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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