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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l 13. 2019

기호학자의 개그콘서트

[잡식성 책사냥꾼]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를 읽고 나면 움베르토 에코는 재미있지만 어려운 책을 쓰는 작가로 보인다. 이런 판단은 분명히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에코는 알고 지내면 꽤 즐거운 인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촌철살인의 교훈을 주면서도 개콘이라도 보는 것처럼 웃게 만드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빌 브라이슨이나 유병재보다 더 웃긴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에코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가 예전에 쓴 글들은 요즘 기준에서 볼 때 위험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아직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필수가 아니던 시절이었다. 농담의 대상이 된 인구집단에게는 분명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웃기는 것은 사실이다.


뉴욕의 택시 운전사들의 성을 보면, 대체로 유대계 아니면 비유대계 둘 중의 하나이다. 유대계 성을 가진 자들은 반동적인 시온주의자들이고, 비유대계 성을 가진 자들은 반유대주의적인 반동주의자들이다. 둘 중의 어느 쪽이든 그들은 단지 주장을 펼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숫제 군부 쿠데타를 요구한다. (41쪽)


에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종별 택시기사에 관한 유머에 열을 올린다. 요즘이라면 상당히 위험했을 발상이다. 하지만 대문호로서 인류 문화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생각해서 너그럽게 넘어가도록 하자.


항공기 기내 쇼핑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웃다가 숨쉬기가 힘들어질 지경이다. 모든 계산이 가능한 대신 환율 계산만 가능한 계산기는 일반 계산기보다 비싸다. 콧구멍에 뿌리는 스프레이를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게 도와주는 기계를 사용하면 원래는 한 손으로 할 수 있었던 일에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 신문 자동판매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동전을 교환해주는 <코인 체인저>는 넉넉하게 많은 수의 동전을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용량이 아주 크게 설계되어 있어서 그 안에 동전을 채우려면 한 재산을 준비해야 한다. 보물 지도를 모아 놓은 책은 아주 비싸지만, 보물찾기에 성공했을 경우 투자 대비 효용이 아주 좋다. 물론 보물찾기에는 다른 보조 기구들도 필요하기 때문에, 금속 탐지기부터 굴착기까지 다양한 도구들 역시 사야 한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역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거의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손을 잘 씻는다든가 음식을 충분히 익혀 먹는 것은 초보들에게나 어울리는 방법이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살펴보자. 구조 조정에 따른 실업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해고당하면 온종일 손톱을 씹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러다가 병에 걸릴 확률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지 말아야 한다. 테러리스트들은 여러 인질들에게 같은 눈가리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핵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버섯구름을 쳐다보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라고 중얼거리면서 씻지도 않은 손을 입에 가져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을 읽은 독서가답게, 에코는 책에 관한 고민도 해결해준다. 집의 서재를 구경하던 손님이 "이 책을 전부 읽으신 건가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가장 현실적이고도 현명한 답은 "하나도 안 읽었어요"다. 읽은 책을 왜 서재에 꽂아 놓겠는가? 그러나 에코는 이런 대답을 경계한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십중팔구 상대방은 이렇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 읽은 책은 어디에다 두세요?" (304쪽)


그래서 에코는 이렇게 대답하기를 추천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적절함과 함께 대답하기 곤란한 다음 질문을 막아주는 한 마디다.


"아니요. 여기 있는 이 책들은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한편으로는 하나 마나 한 소리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인간 공학적 전략을 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문객으로 하여금 작별을 서두르게 하는 효과를 지닌 대답이 아닐까? (305쪽)



에코의 지혜가 집적된 조언이라면 역시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멋진 것들로 가득한 천국과 같은 곳이라면 그걸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온통 바보들로 가득 차 있는 한심한 곳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승을 떠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에코는 묻는다. 그렇다면 태어나자마자 바보 같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답일까? 그렇지 않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쯤에 세상 놈들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바보나 하는 짓일세. 그래서는 절대 지혜에 도달할 수가 없네. 서두르면 안 되지. 우선은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그러다가 마흔 살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고, 쉰에서 예순 살 사이에 이제까지의 생각을 수정한 다음, 백 살에 이르러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 확신에 도달하면 될 걸세. (343쪽)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는 세상을 즐기고, 노년에 이르러서 세상이 바보로 가득 차 있다는 '지혜'를 깨달으라는 것인가. 과연 그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그런 현묘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에코의 지혜에 한 가지를 수정하고 싶다. 에코는 이 책에 나온 글들을 1990년대에 썼다. 이제는 100살이 기본인 시대이니, 나는 120살 정도 되어 확신에 도달하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 레이 커즈와일이 옳아 2047년에 인간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에코의 지혜에는 절대 도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란 이렇게 어렵다.


소설가의 가면을 쓴 기호학자가 쓴 소설을 읽고 머리가 아팠다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추천한다. 이렇게 웃기는 책을 쓴 사람이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를 쓰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르네상스로부터 500년도 넘게 지났지만 우리 시대에도 다빈치적 인간은 존재하는 것 같다. 아쉽게도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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