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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역사가 필요한 이유

과거사에 관한, 일본인들의 선택적 망각

by 히말


뇌신경학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환자인 H.M.은 간질 치료를 위해 해마를 절제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했다. 영화 <메멘토>는 H.M.을 모티브로 한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퍼즐 조각 중 하나에 전류가 흐르는데, 환자는 그것을 기억 못 하고 자꾸 그 퍼즐 조각을 집어 들다가 전기자극에 놀라고는 한다. 그 퍼즐 조각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학습은 간단히 말해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실수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학습도 없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건망증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46%만이 태평양 전쟁을 침략전쟁이라 생각하며, 84%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사죄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13%는 태평양 전쟁의 성격을 자위권 발동이라 판단했으며, 3%는 아시아 해방전쟁이라 대답했다. '아시아 해방전쟁'이라니, 그 당시 전범들이 쓰던 표현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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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기억>이라는 명작 소설로 유명한 오기와라 히로시의 단편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는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무려 네 개의 단편에 태평양 전쟁이 언급되는데, 하나같이 정겨운 고향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 침략전쟁에 대한 죄책감? 그런 거 없다.



소설 <철도원>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는 더 심하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평생 남들을 위해 봉사만 한 이타주의의 화신인데, 대일본 제국의 군인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묘사다. 열 살도 안 된 두 소년의 대화 장면은 더 어이가 없다.



"옛날에 일본은 훌륭한 전투기랑 군함을 많이 갖고 미국이랑 전쟁했대. 비록 졌지만 말이야."
그 얘기라면 들은 적이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했다고 한다. 일본처럼 조그만 나라가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마치 거짓말 같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중에서)



'거짓말 같다'라고 쓰고 '환상적이다'라고 읽는다. '훌륭한' 살상무기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조그만' 나라 일본에 대한 벅찬 감동이 아이들의 가슴을 채운다.



애니메이션 <이 세상의 한구석에>를 보자. 태평양 전쟁 당시 항구 도시에 시집와 살던 주인공의 인생사가 그려진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어촌 마을 사람들을, 미국이라는 미지의 괴물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야기다.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성명이 발표되자, 주인공은 밖으로 나와 밭에 앉아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 본다. 그때, 한 집에서 태극기가 올라와 펄럭인다. 울컥, 울음을 터뜨리는 주인공. 원작 만화에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독백이 나온다고 한다. 미국이 일본을 짓밟듯, 일본도 조선을 짓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는 아무런 해설이 없다. 태극기가 날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란 것인가? '전쟁에 지니 저따위 놈들까지 우리를 업신여기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울먹이는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konoshi-jie-nopian-yu-ni.jpg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한 장면. 당신이 누리는 그 평화가 누군가의 불행을 대가로 한다는 것을 아는가?


전쟁 미화라면, 명작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가 빠질 수 없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남매는 불쌍하게 죽어간다. 그러나 남매의 아버지는 무려 '연합함대'의 함장이다. 태평양을 누비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과부와 고아로 만들었을까.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는 아들은 화려했던 함대 진수식을 떠올리며 군가를 부른다.



<반딧불의 묘>는, 전쟁의 참상을 그린 이야기다. 그러나 그 전쟁이 침략 전쟁이고, 남매의 아버지는 침략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독과 제작진은 모르나 보다.



일본인들의 선택적 망각의 대표적인 사례로 할힌골 전투가 있다. 1939년 몽골 국경지방에서 몽골-소련 연합군과 일본 관동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패퇴한 관동군은 두 번 다시 소련군에게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끝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한 점, 그리고 '8월 폭풍 작전' 당시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항복한 것은 모두 할힌골 전투의 기억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할힌골이라는 지명 자체를 모른다. 할힌골에서 관동군이 박살난 사실 자체를 모른다. 당시에는 '대일본' 육군이 체면 때문에 철저히 입단속을 했기 때문이고, 요즘에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에는 할힌골 전투에서 팔을 잃은 노병이 나온다. 할힌골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하루키가 몽골 여행 중 할힌골 승전 기념비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소설에 넣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이후, 극우 인사들의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




잘못된 역사 교육, 일본만이 아니다



유병재는 <블랙코미디>라는 책에서 쿨과 싸가지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한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하면 그건 쿨한 거다. 하지만 가해자가 괜찮다고 하면? 그건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거다.



남을 다치게 해 놓고 자기가 괜찮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과거사 관련한 일본의 태도가 그렇다.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면서, 단지 결국 졌다는 이유로 피해자 행세를 한다. 난징 학살을 부인하고 소녀상에 화를 낸다. 대신, 야스쿠니에서 살인자들의 넋을 위로한다.



그런데 과연 일본만이 문제인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사주를 받아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하기 전까지, 우리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일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아직도 베트남 전쟁 참전을 빨갱이에 대한 성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수십 년 전에 사라진 대일본 제국이 부활해야 한다면서 할복을 하지 않았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식민지 베트남을 포기하려 하지 않다가 디엔 비엔 푸에서 점령군이 전멸했다. 프랑스에서는 역사 시간에 과연 이 전투를 제대로 가르칠까? 나폴레옹 3세가 주제도 모르고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친히 포로로 잡힌 보불전쟁은 어떤가? 철로를 활용한 병참술이 최초로 승패를 가른 보불전쟁은 전쟁사를 가르치면서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전쟁이다. 프랑스 사관학교에서는 과연 이 전쟁을 어떻게 가르칠까?



파라과이는 남미가 차례차례 독립한 19세기,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침략했지만 연전연패했다. 딱 한 번, 볼리비아를 상대로 이겼는데, 이는 고지대 호흡에 익숙한 볼리비아인들이 연전연패하는 파라과이군을 얕보고 저지대까지 쫓아 내려와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전쟁 패배로 남자 인구가 10분의 1로 줄어버린 파라과이는 한시적으로 일부다처제를 도입해야 했다. 웃기에도 민망한 자국의 역사를 파라과이는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있을까?



어렸을 적에 <한국사 이야기>라는 10권짜리 책을 읽었다. 거기에 보면 관구검이라는 중국 장수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된통 당하고 도망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관구검은 전투에 이기지도 못했으면서 고구려 땅에 승전비를 세우고 갔다고 쓰여있었다. 어떻게 도망가면서 승전비를 세웠을까? 그걸 그냥 놔둔 고구려는 또 뭔가?



나중에 삼국지를 읽으면서 내 의문은 풀렸다. 관구검은 고구려를 거의 멸망시킬 뻔했다.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라는 두 충신의 목숨을 건 행동으로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어린이를 상대로 한 책이라고 해도 어떻게 거짓말을 써 놓을 수가 있나?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한반도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만,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날짜는 모른다. 달력에 표시는 고사하고,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패는 경험치다



장진호 전투라고 들어 보았는가? 한니발이나 조조가 여러 번 보여준 바 있는 포위섬멸전이 나온 '현대전'이다. 심지어 미군이 패한 전투다.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우리조차도 이 전투는 잘 모른다. 그러나 미군은 이 전투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패배를 복기하고 고칠 점을 찾지 않으면 또다시 패배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미군이 일본군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우리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후회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후회야말로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학습 기제로 진화가 선택한 최고의 도구다. 우리가 실패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는 뇌의 배려다.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실패는 괴로운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고칠 점을 찾지 않는다면, 도태하고 만다.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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