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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Sep 01. 2020

2차 대전 소재 소설이라, 흐음...

[간단 평] The Nightingale / Kristin Hannah




Goodreads.com에서 어마어마한 점수를 기록중인 소설. 무려 4.58입니다.


2차 대전 소설이라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습니다.


조디 피코의 <The Storyteller>에 관해 지적했듯, 2차 대전의 참상에 관한 '실제 이야기'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픽션의 입지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



이 소설은 최대 단점은 뻔한 이야기를 매우 느리게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게이텅과 이자벨, 그리고 벡과 비안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처음에 그들이 만날 때부터 보입니다.


그걸 아주 느리게, 동어반복을 하면서 진행하죠.


아니, 어떤 장면이든 느리고 반복적으로 서술합니다.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비안은 유대인 친구 레이첼의 아들, 아리를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려고 합니다.


그걸 알고 벡은 아리의 신분을 위조한 서류를 가져다 주죠. 이름은 대니얼.


이 정도 했으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벡이 비안에게 위조 서류를 건네 준 다음에도 아주 긴 장면이 이어집니다.


비안이 아리에게, '이제부터 내가 네 엄마다. 네 이름은 대니얼이다'라고 하는 장면이죠.


뭐, 작가는 이게 눈물 나는 명장면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스토리가 다 나왔는데 내용 늘리기, 같은 내용 우려먹기로 밖에는 안 보여요.


그런데 이런 장면이 이 소설에는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산뜻하게 진행하는 데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지겨운 얘기를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나름 반전이라고 넣어 놓은 것도 예상이 다 됩니다.


영화 <눈길>에서 이미 나왔고, 아마 다른 데서도 많이 나온 수법이죠.


이자벨의 회상인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의 회상이더라...


너무 고전적인 수법이죠.


안 넘어갑니다.



그나마 캐릭터들을 잘 살렸더라면 이 소설은 나름 장점을 가진 소설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미로울 수 있는 캐릭들을 전부 죽여버렸습니다.


살아난 캐릭이 없어요.


첫 등장이 멋지기 그지 없었던 게이텅도 아주 밋밋한 캐릭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에필로그에 꼬부랑 할아버지로 등장합니다.)


소설 전체를 훨씬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었던 캐릭, 소피도 그냥 조연의 하나로 멈춰버립니다.


주인공 두 자매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아버지조차 제대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이럴진대, 레이첼, 본퓌러, 앙리 등 조연들에 대한 취급은 뻔하지 않겠습니까. 처참합니다.



그나마 잘 살아난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캡틴 벡입니다.


나중에 비안에 의해 그의 풀 네임이 드러나죠. 볼프강 벡.


나치 장교지만 신사답고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


나치 정부 하의 장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죽어가면서도 비안을 원망하지 않는 모습.


기획 단계부터 입체적이기도 했지만('좋은 나치'), 완성도도 가장 높은 캐릭입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도에서 벡을 아득하게 능가하며,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라는 멋진 조합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걸 조금도 표현해내지 못한 게이텅.


악당 캐릭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벡을 능가하는 이율배반성을 가지는 본퓌러.


이 두 명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군요.


주인공 이자벨 대신 죽는 역할로 버려지듯 폐기되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비안이 요리하는 장면입니다.


벡이 낚시해 온 생선을 요리하는 장면이나, 아리에게 줄 소시지 볶음을 만드는 장면.


나치 치하 프랑스인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장면이지만 왠지 정겹지 않습니까?


생선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소피나, 집안 사정도 모르고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아리의 모습도 귀엽죠.



이자벨이 나치에 연행 된 다음의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중언부언, 동어반복 없이 상당히 날렵하게 진행되죠.


영락없이 가스실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 샤워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장면은 아주 괜찮은 전개죠.


쓸데없이 분량 늘이는 데에 힘 쓰지 말고, 이런 식으로 빠르게 전개했다면 훨씬 더 좋은 소설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17시간 이상을 투자한 소설이었는데 좋은 평점을 주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로써 2차 대전을 소재로 하는 소설은 피해야 한다는 조건반사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p.s. 이 소설은 43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화도 예정되어 있어요. 21년 12월 개봉 예정이고, 다코타 패닝과 엘 패닝 자매가 주인공 자매를 연기한다고 합니다. 영화는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소설처럼 중언부언할 시간이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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