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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15. 2017

행복은 소중한 사람의 머리칼에서

[서평] 야마모토 후미오의 단편집 <플라나리아> 중 '사랑 있는 내일'

드라마 '심야 식당'의 한 장면 (저작권자 MBS)


********* 소설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마치, 유명한 만화이자 드라마인 '심야식당'을 카피한 느낌. 주인공은 식당이 아닌 주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심야식당'도 요리보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심야식당이나 싸구려 주점이나, 드나드는 사람들도, 그들의 고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다 같이 살게된 나이도 모르는 스미에라는 여자. 가게에서 손님들의 손금을 봐주고 술을 얻어먹는 것이 일이다. 영업이 끝나면 설거지를 도와주기도 한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주인공. 가끔 머리를 손질하러 들르는 딸을 만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가게 정기 휴일을 하루 앞둔 밤, 주인공은 스미에에게 말한다. 딸이 머리를 자르러 오는 날에, 모르는 여자가 집에 있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미안하지만 내일 오후에 잠깐 자리 좀 피해 줄래?"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응? 하는 소리 뒤에 "누구, 애인이라도 놀러 오는 모양이네"라고 킥킥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렇다고 작게 대답했다. (295쪽)


딸아이와 만나던 날, 스미에는 짐을 챙겨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낸지 얼마나 됐을까. 가게 단골인 할아버지가 역 앞에서 휴지를 나누어주는 스미에를 보았다고 하자, 주인공은 가게 영업 중에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간다. 주인공을 보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누어 주던 휴지를 내미는 스미에. 주인공은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소리친다.

"넌 나랑 결혼해!"
스미에의 입이 떡 벌어지고 실처럼 가느다란 눈은 휘둥그레졌다.
"뭔 소리래, 모범생 아저씨가?"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면 다시 정식으로 말할게. 나랑 결혼해 줄래? 제발 부탁이야."
"에이, 싫어." (311쪽)


거절당하고 힘 없이 되돌아 가는 주인공의 등에 대고 스미에가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미용실 갈 돈 없으니까 내 머리도 잘라달라고 외친다. 그 다음 일요일, 가위와 빗을 들고 집을 나선 주인공. 스미에가 신세지고 있는 요도바시 영감님 집에 도착해서, 그녀의 머리를 만진다.

스미에의 머리를 빗으로 빗어 내렸다. 딸아이의 머리와는 달리, 끝이 죄다 부스스 갈라지고 상해 있었다. 실은 집에 데려 온 첫날부터 다듬어 주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하지만 여자 머리에 손을 대면 정이 든다.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아내와 딸, 네 사람의 머릿결, 그 감촉을 내 손바닥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손바닥에 손금이 새겨져 있듯이 그들에 대한 애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미에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두려웠다. (317쪽)

영화 '페노메넌'의 이발 장면 (저작권자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쳐스)



행복은 소중한 사람의 머리를 다듬는 데 있다. 영화 <페노메넌(Phenomenon)>에서 뭐 필요한 것 없냐는 남자 주인공의 말에, 가위를 달라고 대답하는 여주인공이 모습이 겹친다. 싱글 맘인 여주인공은 노총각으로 어느새 중년이 된 남주인공의 머리를 잘라 준다. 두 사람의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듯 어두운 집안에 비쳐드는 햇살은 지금 이 순간만의 행복일까. 어둑한 집안으로 부서질 듯이 들이치는 찬란한 햇살 조각들. 

가게로 돌아온 스미에는 의외로 딸아이와 죽이 잘 맞는 모양이다. 딸아이의 손금을 봐주는 스미에, 아직 이른 시각에 가게로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하는 주인공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세 사람의 미래는 소소한 생활의 행복으로 빛나는 날들이 되지 않을까.


<플라나리아> 표지 (저작권자 예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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