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Dec 06. 2020

존재하는 가장 엄밀한 학문, 철학

[독서 메모]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과학철학 지식 50




이 시리즈는 믿고 본다. 이번에도 역시 홈런.

<마스터 알고리즘>만 아니었어도 올해 최고의 책으로서 강력한 후보였을 듯.


*****


sense-data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실재론(realism)의 시작이다. 세계가 인간의 인지와는 별도로, 나름대로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실재론은 현재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



길버트 라일은 <마음의 개념>에서 이원론을 범주오류라고 비판했다. 언어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원론은 '평균적인 납세자'라는 말이 특정인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반증으로 확실한 명제가 '증명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반증가능성이 과학의 요건이라는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퍼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확증을 과학의 요건이라고 생각하면 사이비과학과 제대로 된 과학을 쉽게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귀추법(abduction)은 말하자면 귀납적 추론이다. (현대 과학에서 당연시되는 방법이라 정의를 내리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 보이지만, 그게 과학철학의 일이다.) 귀추법은 연역법이나 귀납법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려 할 때 종종 사용된다. 귀추법은 나중에 반증될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실상 '문제점이 없다.' 심지어 귀납법을 귀추법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귀납법의 기대 수준을 낮추면 귀추법이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교회 교리를 결합한 스콜라 철학은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고 현학적인 것으로 악명 높다. 유명한 것으로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올라갈 수 있냐는 신학적 질문이 있다. 아퀴나스는 천사가 텔리포트가 가능한지, 두 천사가 동시에 같은 장소를 점유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역시 미친 놈임.) 이런 무의미한 논쟁이 후세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2001년 물리학자 앤더스 샌드버그는 '천사의 밀도 문제에 대한 양자중력 논의'를 제시하기도 했다.



형이상학이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 물리학의 최전선은 형이상학과 별 다를 것 없는 질문을 던진다.



뒤앙-콰인 논제(The Duhem-Quine thesis) - 포퍼의 반증주의에 대한 반론. 한 가지 가설만 떨어뜨려 시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설의 바탕에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숨은 전제가 항상 존재한다. (뒤앙) 실재와 관념이 일치할 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믿음) 네트워크에 관념이 정합해야 한다. (콰인)



카오스 이론은 앙리 푸엥카레가 3체 문제를 연구하던 중에 처음 알아낸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또다른 드립 한마디. "과학철학은 과학자에게 유용하다. 조류학이 새에게 유익한 만큼만." 저자에 따르면, 이는 과학철학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과학자는 철학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라 한다. (레알?)



***



현상론(phenomenalism) - 현상론은 버클리식 관념론의 라이트 버전이다. 둘의 차이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버클리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관념이라는 극단적 이론이다. 반면, 현상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지각 범위를 넘을 수 없다는 인식론적 주장에 그친다. 현상론자들은 물체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감각자료의 해석에 대해 말한다. 나는 갈색 탁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갈색이며 탁자 모양의 감각자료를 바탕으로 갈색 탁자라는 논리적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현상론은 실재에 관한 비생산적인 논쟁, 그리고 회의주의를 극복하게 해준다. 종종 현상론은 지식이란 감각 경험으로 이론을 확증하는 데 있다는 실증주의로 연결된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에른스트 마흐가 논리실증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른스트 마흐는 현상론 지지자다. 그는 감각 경험을 해석해야 할 자료로 여겼다. 마흐는 뉴턴의 절대 시간 및 공간을 반박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철학 분야에서 마흐의 주장은 논리실증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마흐는 원자론에 반대했다. 원자는 우리가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원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원자가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과학이 유용한 설명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도구주의자에 가깝다. 원자론 이외의 방법으로도 현상의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원자론을 수용하지 않은 것뿐이다.



현상론에 대한 비판 - 간단히 말해 언어상대주의다. 감각자료는 중립이 아니고 문화와 경험 같은 요소에 좌우되는 해석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갈색 감각자료를 보고 있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명제가 아니라 이미 (언어적) 해석을 거친 말이다. 따라서 틀릴 수 있다.



***



포퍼는 반증을 통해 이론이 버려지거나 고쳐진다고 생각했다. 반면, 쿤은 반증이 계속 쌓여 기존 패러다임이 전복된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의 세계를 무한대로 생각하면, 어떤 보편법칙이 참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러커토시는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내게는 고려해볼 가치도 없는 매우 허접한 절충안으로 보임.)



1950년대 초반부터 파이어아벤트는 맥락이 달라지면 용어가 같은 의미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1962년 논문에서 그는 이 현상을 통역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쿤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쿤은 이 생각을 발전시켜 패러다임 전환을 이야기했고, 파이어아벤트는 방법론적 다원주의로 나아갔다.



***



반실재론(anti-realism) - 어떻게든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실재론에 반대하는 입장. 감각에 의존하는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객관적 실재를 결코 직접 포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실재론자는 뭘 얻을 수 있는지 찾아내거나, 아니면 다른 기반 위에서 실재를 구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반실재론이란 이름은 영국 철학자 마이클 더밋이 도입했다. 저 너머에 실재가 있으며 어쩌면 그 실재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에 반해, 반실재론은 실재를 알아낼 수 없으므로 실재에 관한 명제가 참도 부정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용기를 입증할 기회가 없이 죽었다면, 실재론은 그가 용감한 사람이었는지 여부가 참, 거짓으로 가려낼 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하지만, 반실재론은 증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실재론자에게 진리란 말이나 생각이나 증명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다. 반면 반실재론자는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진리가 한정된다고 본다. 실재론자는 끈이론이 정말 참인가에 관심이 있지만, 반실재론자는 끈이론이 관찰, 수집된 자료와 부합하는가, 관찰 결과를 예측하는 데 유용한가 하는 기준에 의해 끈이론의 참/거짓이 결부된다고 생각하며, 이론을 평가하는 수단과 동떨어져서 참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잘못된 이론도 때로 맞는 답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볼 때, 반실재론은 상대주의로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참'은 '우리에게 참'이거나 '현재로서는 참'일 수 있기 떄문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반실재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점이 된다. 명제는 세계의 참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참이나 거짓이 된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이론이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고 믿는 여러 관점을 아우르는 말이다. 즉 실재론뿐 아니라 진리라는 개념 자체까지도 배척한다.



***



환원의 문제. 사회학은 생물학으로,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 가능한가? 여기에서 창발과 수반의 문제가 대두된다.



환원 문제를 다시 말하자면, 저차원 이론(예컨대 물리학)으로 고차원 현상(예컨대 화학)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차원 속성이 저차원 속성에 기인하거나 의거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고차원 속성이 저차원 속성으로 환원된다거나 일치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얘기다. 환원불가능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창발과 수반을 예로 든다.



예를 들면 '합리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념과 행동에 적용하는 정신적 기준이지,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슨은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되는 것이지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에 대한 비판자들은 저차원의 물리적 속성이 엄격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고, 고차원의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된다면, 어떻게 정신적 사건이 실제로 뭔가를 '유발'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정신적 상태는 물리적 과정의 무력한 부산물에 불과한데 말이다.



밀을 비롯한 일부 철학자들은 저차원 속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차원 속성이 발현된다고 주장했다. 저차원 속성에 관한 지식만으로 어떤 고차원 속성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발론이다. 개체 단위의 개미에서 개미 군집의 복잡한 양태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 예다. 뇌의 국소 신경세포 활동이 의식의 전반 현상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호프스태터는 의식이 자기지시(sefl-reference) 방식으로, 또는 고차원 속성이 저차원 속성으로 빙 돌아오는 '이상한 고리'로부터 발현된다고 주장한다. 단순찬 저차원 활동으로부터 상향식으로 예기치 못했던 복잡한 패턴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데, 국지적 차원에서 무계획적으로 벌어진 활동이 전체적인 차원에서 정교하게 설계한 것 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카오스 이론과도 연결된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창발론에 대해서는 신비주의적이라는 비판이 그치지 않는다. 수반과 창발론 모두 유물론을 바탕에 두지만, 환원의 한계에 관해 색다른 관점을 지닌 접근법들이다.



***



괴델은 두 가지 불완전성 정리를 주창했다. 첫째, 한 체계를 지배하는 모든 진리를 완전히 기술하려고 하면 반드시 서로 모순된 진리가 드러난다. 즉 완전한 진리 체계는 불가능하다. 둘째, 한 체계의 무모순성을 그 체계 안에서 증명하려 하는 어떤 시도도 결국에는 모순을 일으킨다.



불완정성 정리의 또 다른 결론은 해법이 없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골드바흐의 추측이 한 예다. 또한 튜링은 어떤 명제가 증명 가능하며 어떤 명제가 증명 불가능한지 미리 알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역시 튜링은 왕천재. 암튼 영국 정부는 뭔 짓을 한 거야.)



인지 과학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괴델의 문제를 이렇게 비유했다. 내가 미쳤는지 아닌지 내 논리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다세계 해석은 미국 물리학자 휴 에버렛이 제시한 것이다. 양자 붕괴 순간, 경우의 수만큼 새로운 다중우주가 발생한다는 얘기다. (<노인의 전쟁>에서 이걸 그대로 차용했었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측정 행위와 측정되는 물체의 특성이 서로 간섭하는 '관찰자 효과'라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물론 이것도 영향을 미친다), 양자 체계의 기본 속성 때문이다.



***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자신만의 '선험적 관념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정신이 수동적이지 않고 스스로 지식의 형태와 한계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사물의 본질이 우리의 지각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빚어낸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의 주축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 개념이 세계의 본연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 정신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말하는 관찰자의 역할은, 정신이 실재를 구체화하다는 칸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아 보인다.



칸트가 해결하려 했던 문제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의문이다.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본질(noumena, 물자체 物自體)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경험 너머에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없으며, 논리만 믿고 실재에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떤한 형이상학적 사유도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했다.



어떤 측면에서 칸트의 사상은 과학에 긍정적이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관해서만 논리를 펼칠 수 있지만, 겉모습을 지배하는 규칙은 객관적이다. 사물은 자연법칙을 따르고, 자연법칙은 우리 지각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지만, 우리가 그 한계 안에 머무르는 한 귀찮은 회의주의 문제는 회피 가능하다.



콰인은 <경험주의의 두 독단>이라는 논문에서 칸트의 분석명제(쓰인 어휘의 의미에 따라 참이 되는 명제)와 종합명제(세계와 관련지어 참이 되는 명제) 분류를 비판했다. 콰인은 분석명제가 동어반복이라는 주장을 비판했다. 만약 분석명제가 동어반복이라면, 우리는 동의어나 '같음'을 정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유사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즉 순환논법이다.



ME: 에이어는 분석명제는 동어반복이고 종합명제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종합명제는 물론 대응이론에 근거해 진리 판단이 가능하다.



***


현상학은 주관적 실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관념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후설은 독립적인 물리적 세계를 지각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의식이라는 현상에 나타나는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 '실제' 세계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회의주의를 피할 수 있고, 의식적 경험 그 자체의 성격과 구조를 통해서 과학의 기반을 세울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우리에게 존재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더 실용적인 차원에 현상학의 초점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학은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뿐 아니라 세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이 항상 어떤 지향성에 따라 빚어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은 항상 무언가를 '향하거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대상을 중립성으로 보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이 접근법에 실용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대하는 의식적인 태도를 선택할 뿐 아니라, 사물을대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으로 나누고 객관적인 것을 실재라고 가정할 수 없다.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 지향성의 본질과 구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세계 안에,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용자가 기술로부터 소외되는 것에 집중했다. 물레방아가 수력발전소로 바뀌면서 일꾼은 기술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에 대한 이해력을 잃지 않도록, 기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알?)



***



'부록'의 용어설명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시각들.


진리 대응설 - 대체로 간접 실재론(실재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파악 가능하다는 입장)과 연관.


진리 정합설 - 대체로 반실재론과 연관.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에는 뭔가를 고치거나 만들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