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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20. 2020

유한성을 직면하는 법

[간단 평] 헨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

의사들의 에세이도 이제 서점가에서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N처럼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리는 사람도, L처럼 현재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도 있다. 모두에게 공통되는 점이라면, 같은 유한자의 입장에서 환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이 느끼는 비애와 분노다.



때로는 그 감정이 지나치게 격앙되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다소간의 과장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그런 감정의 홍수 속에서, 헨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은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환자들의 생사를 넘나들며 가졌던 감정들이 시간을 지나면서 무뎌졌다고 단정지어도 될까. 그의 글은 너무도 건조하다. 아니, 가볍다. 수술이 실패할 확률이 5%라는 말은 최대한 경쾌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것이 전략적으로 좋다고 언급하고, CEO가 하는 '경영'이라는 것은 병원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꼬집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비꼬는 말에 최적화된 듯한 영국식 억양이 들리는 듯하다.


때로는 조금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의사 복장에서 넥타이와 시계를 빼니 꼭 간호사처럼 보인다든가, 지방의원에서는 어차피 실력이 안 되니 전원시켜봤자 별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저자. 더구나 저자는 꽤 저명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그의 이런저런 가벼운 표현이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측하는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신경을 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193쪽)


그런 담백함이 헨리 마시라는 사람의 글이 가지는 힘이다.


이 책에 나오는 환자들의 수는 여느 의사 수기에 비해 2배, 3배가 넘는다. 한 환자에 할애된 분량이 적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많은 환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건조하게 써내려간 글이, 의사로서 헨리 마시조차 건조한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슬픈 이야기를 45분을 내리 들으니 도저히 더 이상은 힘들었다. 두 손을 들고 절망적으로 말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제가 없을 때 일어났던 일이에요." (272쪽)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한갓 인간으로서 운명에 거스르려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모습도, 그간 읽어온 의사들의 수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자신의 실수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환자에 대해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면서 머리를 싸매지만, 그뿐이다. 신경은 이미 절단되었고, 회복할 수 없다. 왜 직접 수술하지 않고 레지던트에게 맡겼을까 자책하지만, 자신이 직접 수술했다고 해서 실수를 절대 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무엇보다, 이 미안함과 죄책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흐려져갈 것이라는 사실도 그는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고통은 어차피 뇌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환상통을 앓고 있는 한 환자에게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말, 환자에게는 '모든 게 다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라고 들릴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현대의학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동시에 읽은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라는 의사 수기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회진 중에 만난 환자에게 상을 줘야겠다고 의사가 농담조로 말한다. 환자 앞에서 그는 옆에 선 간호사에게 상장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다음날 간호사가 정말 상장을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유쾌한 에피소드겠지만, 과연 그것이 간호사 입장에서도 그랬을까.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라는 간호사의 수기도 읽었다. 메르스 사태 당시 코호트 격리 상황을 신문에 기고해서 유명해진 김현아 간호사의 글이다. 이 책에는 간호사가 해야하는 일의 목록이 정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환자가 씩씩하니 상을 줘야 겠다고, 하나 준비해 보라고. 툭 던지는 말. 그게 의사에게는 농담이겠지만 간호사에게는 뭐였을까.


최근에 읽은 간호사들의 수기는 모두 은퇴하거나 외국으로 건너간 간호사가 썼다. 우리나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에는 아마 글을 쓴다든가 하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을 다루는 일을 하다보면 짐짓 거대한 뭔가를 상대하는 느낌도 있을 것이고, 그런 특별한 경험을 다소 과장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인간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응급외과의 N의 글을 읽으면서 꽉차 오르는 감정의 울림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에 감정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의사도 직업이다. 의사도 사람이다. CEO의 면담 요청을 받고 무슨 일일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나, 두 달 동안 하고 있었던 깁스를 풀고 다리를 만지며 좋아하는 모습까지, 헨리 마시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준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쿨하게 행동하는 헨리 마시가 멋져 보이는 것은,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외과에 관한 아픈 진실 가운데 하나는, 정말로 어려운 수술을 잘하게 되는 유일한 조건이란 수술하면서 실수를 많이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평생의 상처를 입은 환자를 내 뒤에 줄줄이 남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를 계속하려면 약간은 사이코패스이거나, 적어도 상당히 두꺼운 낯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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