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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25. 2020

빈센트와의 대화

빈센트의 편지들을 읽고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를 다룬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세번 째다. 고흐를 다룬 책은 거의 모두 그의 편지를 조금은 싣고 있으니 그것까지 합치면 더 자주 그의 편지를 접한 셈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편지를 읽다보면 빈센트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처음 읽은 책은 <반 고흐, 마지막 70일>이다. 빈센트가 마지막 70일을 보냈던 곳은 오베르쉬르와즈(Auvers-sur-Oise).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 <까마귀와 밀밭>을 그린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의 두 저자는 빈센트가 죽기 전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는 세간의 믿음을 반박하려고 책을 썼다고 했다. 오베르에서 빈센트는 건강이 좋아졌으며, 주변 사람들과도 잘 지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편지와 화풍을 통해 이 점을 입증하려고 했다.


빈센트의 화풍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영화, <러빙 빈센트> 역시 비슷한 주장을 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마치 탐정처럼 빈센트의 죽음을 뒤쫓는 아르망 룰랭이다. 빈센트는 적어도 스스로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영화의 결말인데, 설득력이 꽤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빈센트의 동생으로서 테오 반 고흐 역시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형이 죽고 나서 겨우 6개월을 더 살고 사망했다. 나는 그 사실을 <반 고흐, 마지막 70일>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형제의 우애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래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2>(이하 편지2)를 접하게 되었을 때, 오랜 친구의 편지를 다시 들춰보는 것처럼 기뻤다.


테오와의 편지에서 가장 드러나는 특징은 아마도 돈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능한 한 아끼며 살기 위해 요즘은 무료식당에서 밥을 먹는단다. (62쪽, 1882년 1~2월 편지)
한 달에 100프랑이면 나 혼자 쓰기에는 충분하지만 매일 모델비를 주고 그들과 식사 등을 하려면 부족하거든. (63쪽, 1882년 1~2월 편지)
과감하게 30호 크기의 캔버스를 사용할까 한다. 여기서는 이 캔버스 하나에 4프랑씩 하는데, 운송료를 생각하면 그리 비싼 편은 아니다. (245쪽, 1888년 6월 편지)
다른 집을 하나 더 마련했으면 한다. 1년에 365~400프랑 정도를 더 쓰고 쓰지 않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반 고흐, 마지막 70일> 46쪽, 1890년 6월 10일 편지)

그의 초기 편지들에서, 빈센트는 테오가 자신의 그림을 파는 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고 책망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곧 사라지고 만다. 그의 후기 편지들은 테오가 팔지 못하는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동생은 형을 격려한다. 그의 위대함이 미술사의 상식이 된 오늘날의 우리들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테오는 형의 그림에서 정말로 그런 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함도 생긴다. 테오는 그만큼 놀랍도록 정확하게, 빈센트의 그림이 가지는 위대함을 짚어낸다.


형태를 왜곡하여 상징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형의 그림들의 많은 곳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재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은 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모험을 감수했을 테니 머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란을 겪은 것도 무리가 아니야. (351쪽, 1889년 6월,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


빈센트는 끊임없이 반추한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본다. 위대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역지사지의 성찰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가족이나 조국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매력적인지 모른다. 우리는 가족뿐 아니라 조국에서도 떠난 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으니. (중략) 그런데 사창가의 기둥서방이 문 앞에서 취객을 몰아낼 때도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을 테고,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것처럼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게 밝혀질지도 모른다. (273쪽, 1888년 8월 편지)


이렇게 인간적인 울림을 주는 빈센트지만, 그의 위대함은 철학적 반성이나 서정적 섬세함에 그치지 않는다. 한 예로, 그의 박학다식은 놀라운 정도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미술 역사와 이론을 공부했다. 많은 그림을 본 것은 물론이다. 빈센트에게 밀레는 절대자였다. 마네는 그가 인정하는 천재다. 흥미로운 점은, 그에게 미술보다 문학에 대한 경의가 더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아내고 싶다. 마네는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 쿠르베도 그랬고. 아, 망할 자식들! 나도 그들과 같은 야망이 있다. 졸라, 도데, 공쿠르 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다. (197쪽, 1885년 12월 편지)


졸라와 발자크를 경애하는 빈센트. 그러나 그의 최애 작가는 디킨스다.


어떤 면에서 영국의 데생화가들은 문학에서의 디킨스와 닮아 있다고 생각되네. 그들에게서 빛나는 점은 바로 우리가 늘 되돌아오게 되는 고귀하며 유익한 '감성'이지. (편지2 109쪽, 날짜 미상,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
이는 마치 디킨스나 발자크, 졸라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지. (같은 편지)
디킨스의 신판 <크리스마스 캐럴>과 <신들린 남자>를 6펜스에 구입했네. 디킨스의 작품이라면 어느 것이나 다 좋지만, 그 가운데서도 앞서 말한 두 콩트는 특히 마음에 드네. 채 소년이 되기 전부터 그것들을 거의 매년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늘 새로움을 발견하고는 하네. 나한테는 작가 자신이 감수한 프랑스어판 <디킨스 작품 총서>도 있다네. (편지2, 171쪽, 날짜 미상,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


<크리스마스 캐럴>을 매년 다시 읽고, 프랑스어판 디킨스 전집을 가지고 있지만 영어판 디킨스를 하나씩 사모으는 빈센트의 모습. 디킨스 열혈팬인 빈센트의 모습이 왠지 귀엽기까지 하다.

빈센트는 자신의 그림에 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는지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다음은 그의 명작 중 하나인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빈센트 본인의 설명이다.


이 그림은 위쪽 절반은 노란색, 아래쪽 절반은 보라색,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울 수 있네. 그럴 때 노란색과 보라색이 너무 지나치게 대조되어 거슬리는 면이 있는데, 바지를 하얀색으로 칠해서 눈을 쉬게 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게 해준다네. (253쪽, 1888년 6월 18일,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다음의 유명한 문구도 그의 편지에서 나왔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262쪽, 1888년 6월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는 빈센트가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나 같은 주제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나란히 실어준 것은 사려 깊은 편집이다. 라파르트는 빈센트에게 있어 유일한 네덜란드인 친구 화가였다. 그들은 1880년 11월에 만나, 약 5년 간 친구로 지내며 미술에 대해 논했다. 라파르트는 고흐가 죽고 나서 겨우 2년이 지난 1892년,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빈센트가 죽고 얼마 안 된 시점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빈센트는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그를 감당해낼 사람은 많지 않았네. 우리의 관계는 5년 동안 지속되었네. 종종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그를 내가 참아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그만큼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 걸세. (편지2, 12쪽)


둘의 우정은 라파르트가 보낸 편지에 빈센트가 격하게 반응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졸라와 세잔의 우정이 졸라의 소설 <작품>에 대한 세잔의 격분으로 파경을 맞은 것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된 라파르트의 편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


이런 작업을 이야기하려고 어떻게 감히 밀레와 브르통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나? 잘 듣게! 예술은 이 따위로 안일하게 다루어지기에는 너무도 숭고하다네. 안녕히. 여전한 자네의 친구. (편지2, 252쪽)


그러나 그에 대한 고흐의 맞받아치기도 만만찮다. 방어에 그치지 않고 라파르트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 집요하게 철회와 사과를 요구한다.


자네는 친구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네. (257쪽, 1885년 7월 6일)
자네처럼 난폭하게 비난해대는 사람들 없이도 나는 내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걸세. (264쪽, 1885년 7월 21일)
마지막으로 말함세. 기탄 없이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내가 돌려보낸 편지부터 최근 것까지 자네의 편지 내용을 모두 취소하게. (267쪽, 1885년 7월 21일)
절대로 이 무네를 흐지부지한 상태로 남겨두고 싶지 않네. 이번 주 안에 꼭 답장 주릴 바라네. 자네 편지에 따라서 내 입장을 결정하지. (268쪽, 1885년 9월)


9월에 라파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비슷한 시기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결국 둘은 화해한 모양이다. 그러나 둘의 편지 왕래는 다시 갑자기 끊기고 만다. 1880년 11월 빈센트를 처음 만났던 라파르트가 나중에 그와의 우정을 '5년 동안'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1885년에 둘 사이의 관계가 끊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흐가 죽고 나서 겨우 2년이 지난 1892년, 라파르트는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그 둘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편지2>에서 좋았던 점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잘 나와 있지 않던 시엔에 관한 부분이다.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은 빈센트가 가졌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 아이들을 그린 빈센트의 그림은 그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른 광채를 뿜는다.

아기는 어느 새 일고여덟 달 난 매우 건강하고 온순한 꼬맹이로 자랐다네. 나는 녀석을 위해 고물상에서 직접 요람을 골라 어깨에 짊어지고 오기도 했지. (편지2, 146쪽)
아이와 아이 엄마를 도운 일이 몇몇 친구를 잃게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 집에 빛을 선사했네. (중략)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내 집은 한층 더 따뜻한 '가정'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네. (편지2, 147쪽)


빈센트가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헤어진 것은 빈센트뿐 아니라 시엔, 그리고 특히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아를 시절, 빈센트는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민원의 대상이 된다. 직접 쓴 편지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빈센트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깔로 치면 만만찮은 고갱조차 그에게 치를 떨었고, 귀를 자른 사건은 기록으로도 잘 남아 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경원이 오해 때문이었다고 변호할 수만은 없다.


정말 아쉽지만, 빈센트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리도록 고독했던 그의 삶을 생각하면, 그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빈센트의 삶과 예술은 절대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있다. 그렇나 이렇게도 나는 생각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가 온갖 '사람의 냄새'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가 사실은 그냥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희미한 불빛 아래 난롯가에 앉아, 창문 너머 눈 덮인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늘 행복하다네. (편지2,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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