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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27. 2021

동시다발적 독서의 즐거움


[책을 읽고] 십팔사략 / 증선지


증선지의 <십팔사략>은 삼황오제의 전설부터 남송 멸망까지를 다룬 역사서로,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 등 18개의 사서를 요약한 것이다. 18개의 사서를 읽은 적이 없는 나로서는 증선지가 가필을 했는지 여부가 가장 궁금했는데, 이유는 몇몇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극단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자는 곽거병 같은 올스타급 캐릭에 대해서도 단점을 언급하는 반면, 송태조 조광윤에 대해서는 칭찬 일변도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면 왜 나는 그의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까? 이 책에 나오는 조광윤은 당 태종이나 한 무제는 물론, 이후에 등장하는 영락제나 강희제와 비교해도 별로 꿀릴 것이 없어 보인다.


신법으로 유명한 왕안석 역시 대단히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북송 시대 정치는 왕안석의 신법을 두고 신법파와 반대파가 교대로 집권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왕안석과 그의 라이벌들을 모두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왕안석이 훨씬 더 훌륭한 인격자로 묘사된다.


왕안석은 조정에서 자기가 마련한 새 법을 뜯어 고치거나 철폐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태연해했다. 하지만 모역법을 폐지하고 옛날의 차역법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울부짖었다. (중략) 모역법은 왕안석이 신종과 2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실시한 것으로 자세한 세칙까지 갖추어 조금도 미비한 점이 없는 법률이었다. (1048쪽)


참고로, 모역법은 부역 면제자에게 돈을 받아 실업자를 고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훌륭한데, 신법에 기본적으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던 소식(소동파)조차도 모역법 반대에는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소동파는 그로 인해 투옥되고 좌천되어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으며, 그러던 차에 (내가 아주 좋아하지만 돈이 없어 못 먹는) 동파육도 만들고 적벽부도 지었으니 그의 개인적 불행이 인류에게 유익한 유산을 남기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역사에는 늘상 있는 일이기도 하다.


***


십팔사략의 반 정도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다. 춘추전국 시대와 진한교체기(사기), 삼국 시대(삼국지), 그리고 송 휘종(수호지)이나 가사도(쿠빌라이칸)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던 5대 10국이나 남송, 금나라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신경이 쓰였던 것은 역시 중국의 역사서에 가끔 언급되는 우리나라 이야기였다.


백만 대군이 와서 겨우 3천 명이 살아 돌아갔다는 살수대첩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그 기록이 <수서>에 남아 십팔사략에까지 실려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지 않을까? 패전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중국의 역사 서술 태도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물론 수나라, 특히 수양제는 중국 역사의 오점이라는 데에 중국인들이 만장일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도 하겠다.)


5호 16국 시대에 북조를 통일했던 강국, 북위의 개혁군주 효문제는 즉위 당시 겨우 5살이었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을 했는데, 그녀는 균전제 등 개혁 정치를 실시해서 효문제가 명군이 될 초석을 놓았다. 그런데 이 황후가 바로 낙랑군, 즉 조선 출신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멸망한 지 오래였으니, 고구려나 백제 사람이었을 것이다.)


<삼국지>의 후한 헌제만큼 한심한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송 휘종은 <수호지> 덕분에 꽤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왕이다. 십팔사략에는 이 사람에게 전략적 충고를 한 고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편 이 무렵 송나라에 고려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에는 의원이 적으니 송나라 의원을 좀 파견해 주시오."하고 요청했다. 휘종은 두 사람의 의원을 보냈다. 그 의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고려의 진정한 뜻은 실은 의원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여진과 동맹하여 거란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알고, '거란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소. 중국을 위해 충분히 개봉을 수비해 줄 것이오. 여진은 이리와 같이 야만적인 나라이므로 그들과 교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급히 여진에 대한 방비를 굳게 단속하는 것이 현명한 계책이오'라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하므로 휘종은 몹시 불쾌해했다. (1068쪽)


얼마나 정확한 분석인가. 그러나 상대는 송 휘종이다. 왕이 그림 잘 그리고 글씨 잘 쓰는 것이 나라의 우환이 된다는 사실은, 이후 우리나라도 선조나 (싸패 본좌) 인조의 사례로 잘 배우게 되지 않는가. 고려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송나라는 이후 정강의 변을 거쳐 남쪽으로 도망갔고, 휘종 개인도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은 노후를 보내게 된다. (나라 말아먹은 인간이 그 정도면 분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평하고 싶기는 하다.)


뱀다리지만, 십팔사략에도 <수호지>의 송강과 방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수호지>와는 달리, 송강은 그냥 도적떼 두목이고, 방랍은 민중혁명 지도자다.


***


내가 비슷한 시기에 읽은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에는 주희와 육구연이 벌인 '태극' 논쟁이 나온다. 그것을 십팔사략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다.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는 것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주희와 같은 시대에 임천에 호가 상산인 육구연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주희와 '태극도설'에 대해 논쟁했다. (중략) 이렇게 상산은 주희가 경서의 훈고와 주해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 (1136쪽)


구체적으로 육구연이 주희의 어떤 주장을 비난했는지, 십팔사략에는 잘 나와 있지 않다. 태극 논쟁은 강신주의 책을 보면 잘 나와 있다.


<노자>는 첫 장에서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고 했고, 마침내는 그것을 동일화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노자의 가르침입니다. 노자의 학문이 바르지 않고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그 가려진 곳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노형께서는 우리 학문에 힘쓰시는 것이 깊고 오래되었는데도, 오히려 이것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육상산선생전집>,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1814~1815쪽에서 재인용)


주희는 '주돈이'라는 학자의 태극도설을 전격 채택, 만물의 기원으로 '태극'을 제시하였는데, 유학자 육구연은 이것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육구연은 노자의 <도덕경>이 정치하지 못한 논리 체계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주희가 신유학의 토대를 시작하는 지점에 노자의 개념을 차용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주희는 굉장히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는데, 이는 중국어(한문)의 기본 문법조차 무시하는 아주 빈약한 논리였다.


태극도설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데, 해석하면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육구연은 이것이 논리적으로 엉성한 얼버무림이라고 지적했는데, 이에 대해 주희는 저 문장이 '태극은 무극의 형상을 하고 있다'라는 기괴한 해석으로 응수한다. 이는 순접 또는 역접을 뜻하는 접속사로밖에 안 쓰이는 '이(而)'를 수식어구를 이끄는 접사로 곡해한 것이다. 정말 창피할 정도로 허술한 변명이다. 이런 점을 육구연이 다시 비판한 것은 물론이다.


육구연은 위에 인용된 글에서와 같이, 주희가 '경서의 훈고와 주해에만 몰두'하는 것을 비난했는데, 이후 유학이란 학문이 주희의 훈고와 주해에만 몰두하게 된 점을 생각해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철학 vs 철학>을 읽을 당시, '태극도설'을 둘러싼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은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가 십팔사략에서 간략하게나마 다시 언급되는 것을 만나니 흥미가 다시 생겼다. 독서백편의자현(見)이라는 말은 아마도 같은 책만 줄기차게 읽으라는 뜻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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