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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04. 2021

[책을 읽고] 삼국지의 영웅 조조 / 장야신

1927년 7월, 루쉰은 위진 시대 문학 관련 강의를 하면서 조조를 긍정적으로 평했다. 이 책을 읽고 새로 알게 된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다. 문학가 루쉰이, 건안문학의 2인자이자 <단가행> 등 오늘날까지도 인기가 많은 시가를 만든 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루쉰은 이 강의에서 조조가 이룬 정치와 문화 분야의 업적도 함께 호평하기는 했다. 그러나 루쉰의 강연 하나만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가치라면, 참으로 가볍지 않은가.


루쉰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담은 짤막한 제9장, 그리고 조조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정리한 제8장은 읽을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을 이루는 제7장까지의 내용은 삼국지 애호가의 독후감 수준이다. 아니, 웬만한 삼국지 매니아라면 이 책보다는 나은 글을 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삼국지연의>의 독후감에 그치기 때문이다. 정사 삼국지만 읽어봐도 <삼국지연의>와는 전혀 상반되게 묘사되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악인 중의 악인이라 할 수 있는 공손찬과 도겸이야말로 나관중에 의해 호인으로 각색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능력은 없지만 사람좋은 것으로 그려진 이 둘은 사실 그 정반대의 인물들이다. 능력은 출중하나 악을 위해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공손찬의 악행은 요즘에는 너무 유명해져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도겸 또한 만만치 않다.


도겸은 젊었을 때부터 '막돼먹은 놈'으로 유명했고 깡패들과 함께 못된 짓을 일삼고 다녔다. 그러던 중 변장, 한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된 군대에서 그는 상관인 거기장군 장온을 모욕하는 죄를 저지른다. 도겸은 상관모욕죄로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모욕을 받은 당사자인 장온은 도겸의 재주를 아껴 그를 용서해 달라고 천자에게 탄원하기에 이른다. 이에 도겸은 사면을 받았는데, 천자를 아뢰고 나오는 도중에 장온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구명해준 그에게 감사함을 표현해도 부족한 상황에, 도겸은 장온에게 다시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 도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천자에게 사죄하러 온 것이지 네놈에게 사죄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런 도겸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도겸은 조조에게서 엄청난 타격을 받았지만 전통적인 무인의 풍격을 지키고자 했다. (278쪽)


조숭 사건은 도겸에게는 무척 억울한 일이었다. 호의로 베푼 일이 끔찍한 강도 살인 사건으로 바뀌었고, 그 책임을 꼼짝없이 뒤집어쓰게 되었다. (279쪽)


정말 <삼국지연의>를, 그것도 한 번 정도만 읽어야 할 수 있는 헛소리다. 도겸이 '무인의 풍격' 따위를 지닌 적이 없는 인물이라는 점은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되는 명제이니 제쳐두자. 두 번째 인용문은 도대체 쉴드 칠 방법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조숭 살해 사건이 장개의 단독 범행이라 가정해도, 장개의 상관인 도겸이 그 일에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보디가드로 붙여준 군인들이 살인 강도를 벌였는데, 그런 보디가드를 붙인 장본인에게 책임이 없단 말인가? 아니, 도겸의 보디가드가 진짜 도적들을 막다가 실패해서 조숭 일가가 죽었어도 도겸은 자기 영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호위병이 살인마로 바뀐 사태에 대해 호위병 상관에게 책임이 없다는 게 무슨 논리인가?


이 책에는 또 이런 문장도 있다.


조조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문학적 소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206쪽)


실무 능력의 배경에 '그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자기 반성의 습관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적 소양이 정치적 군사적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무 생각 없이 쓴 이런 문장은 이 책이 특정 인물을 주제로 쓴 소설 독후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을 입증해줄 강력한 방증이 된다.


<창천항로> 이후 조조에 관한 책이 줄지어 출간되고 있다. 트렌드에 맞추어 대강 쓴 책이 출판되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책을 수입까지 해서 번역, 출판하는 일은 그 자본주의 저렴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주 강성 조조빠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을 집을 때 아주 많이 망설였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집은 책이 이 모양이니, 다시는 조조를 주제로 한 책을 읽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유명한 조조빠인 마오쩌뚱은 조조를 기리며 이런 시를 지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일
위나라 무제 조조는 채찍을 휘두르며
동쪽으로 갈석산에 올라 시를 지었지.
쏴하고 부는 가을바람 오늘도 그대로인데
사람 사는 곳은 바뀌었네. (170쪽)


마오쩌뚱은 군사적, 정치적 재능에서 조조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인물이지만, 아쉽게도 문학적 재능만큼은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인물에 대한 느낌을 적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주변 지인에게 보이기에도 부끄러운 글을 출판하는 일은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뚱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있어도, 장야신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별로 있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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