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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25. 2021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 에스에프 에스프리 / 셰릴 빈트




이 책은 아주 진지한 과학소설 논문집이다.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과학소설의 역사와 함께 살펴본 뒤, 저자는 과학소설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나간다. 인지적 소외, 메가텍스트성, 공동체(팬덤)의 역할, 변화에 대한 태도 등이 과학소설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되고, 해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과학소설의 실천지향성이다.


케셀의 이야기와 같은 SF의 반사실적인 비전이 우리가 현재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미래의 결정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면, 도피하려는 욕구는 망상 이상이 된다. (518쪽)


최초의 과학소설 중 하나로 거론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바로 그런 특성을 우리는 발견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500년 전 쓰여진 이 '소설'은, 암울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분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실과의 관여 정도, 그리고 어조는 조금씩 달라도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1726),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1818)은 물론 <플랫랜드>(에드윈 애벗, 1884)나 <네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1998)에서도 우리는 실천성을 발견한다.


'인지적 소외'는 일반 소설에 비해 과학소설에서 아주 급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다만, 과학소설의 인지적 소외는 판타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와 관련해서, 새뮤얼 텔라니는 이렇게 말한다.


SF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그린 소설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과거에 발생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포함하는 양식이다. 이러한 양식은 자연주의 소설의 '일어날 수도 있었던' 상황과 판타지 소설의 '일어났을 리 없는' 상황과는 구분된다. (171쪽)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했다. 예컨대 최고의 과학소설 중 하나로 언제나 언급되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판타지에 가깝다는 말을 아주 지겹게 들어 왔다. 아무래도 좋다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개의 과학소설 작가들은 자신이 판타지 작가가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 판타지는 아무렇게나 상상의 나래를 굴려도 좋지만, 과학소설의 경우 그것은 어느 정도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것 같다.


그렇다면 톰 고드윈의 <차가운 방정식> 같은 이야기가 과학소설로 소개되는 현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이 졸작에서, 주인공 소녀는 약품 수송선이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된다. 나는 이 책에서 다음 대목을 만났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내가 <차가운 방정식>을 접했을 때 기가 막혔던 것이 단지 나만의 경험은 아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분명히 소녀 대신 희생될 수도 있는 다른 중량이 있었을 것이다. 또는 본부에서 혈청을 가지고 조금 늦게 워덴에 도착할 수 있는 다른 파견선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 탓으로 돌리는 것은 EDS가 얼마나 많은 연료를 운반하는지, 우주선은 얼마나 자주 외딴 식민지들을 방문하는지에 관해 인간이 만든 프로토콜의 역할을 무시한다. (487쪽)


<차가운 방정식>은 판타지도 아니다. 그만큼의 상상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매우 엉망으로 쓰여진 억지 이야기일 뿐이다. 도대체 이런 글을 검증 한번 해보지 않고 출판하는 것은 1954년 당시 출판 시장이 너무 활황이었기 때문인가?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경계는 테드 창 역시 간결하게 표현한 바 있다.


판타지는 근본적으로 우주의 일부는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중략) 그러나 판타지와 달리 SF는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차이는 작가가 논리라는 도구를 사용해 독자를 납득시킬 책임이 있는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각도 기울이지 않고 쓰여진 <차가운 방정식>과 같은 이야기는 절대 과학소설이라 할 수 없다.


새뮤얼 텔라니는 발생 가능성을, 테드 창은 논리적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제시했지만, 결과는 같다. 그런 의미에서 대체역사소설은 과학소설과 아주 긴밀하게 엮여 있다. 이 책이 바로 그 부분을 다루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이 책은 과학소설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케셀의 <침략자들>(1990)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피사로의 페루 침략 5년 전, 어떤 사람이 나타나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 잉카인들에게 경고한다. 잉카인들은 착실히 준비해서 스페인군의 침략을 격퇴한다. 과거의 역사를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과학소설 서사다. 과학소설가 중 최고로 인식되는 작가 중 한 명인 필립 K. 딕이 걸작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를 썼다는 사실만 봐도 이 두 장르의 '얽힘' 내지 '겹침' 현상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대체역사소설이야말로 과학소설의 실천성을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 장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소설은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기술 진화를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그렇기에 과학소설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소설이란 장르의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과학소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는다. 5개의 성(gender)과 9개의 성적지향성이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그리고 인과성 대신 최대/최소 서술로 현실을 인식하는 '헵타포드'라는 지적 생명체가 등장하는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정말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하니 최초의 과학소설가는 장자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나라는 존재가 나비의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더 극적인 서사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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