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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11. 2021

청소년 노동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노동 환경이 문제

[책을 읽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 은유



생수를 마신다. 카드 해지를 하려고 콜센터에 전화를 건다. 뷔페식당에서 밥을 먹고, 귀가 길에는 지하철을 타려 스크린도어 뒤에 줄 지어 선다. 이 모든 장면에 특성화고라는 이름의 제도가 뱉어내는 청소년 노동자들이 있다. 이 모든 장면에 그들의 죽음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21쪽)


특성화고 학생들은 졸업 시즌에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다. 현장실습은 종종 정직원 계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습 기간 동안 그들은 대단히 취약한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위험한 작업 환경, 불법적인 시간 외 노동, 선배들의 폭언과 폭행...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한 계약서가 그들의 경험을 이룬다.


하이데거는 어떤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즉 '낯선' 모습을 보이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직시하게 된다고 말했다. 즉 일상적인 것들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12쪽)


그렇다. 이 책에 나오는 사고들은 거의 모두 언젠가 뉴스에서 듣고 지나쳤던 것들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사람들에게 가시화되지만, 곧바로 다시 망각의 강을 건너가 버리는 사건들이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군도 특성화고 졸업생이었다. 통신업체 콜센터 해지방어팀에서 일하던 중 극단적 선택을 했던 홍수연 양 역시 특성화고 현장실습 중이었다. 성남 지역 외식업체 요리 부서에서 수프 끓이는 일을 전담했던 김동균 군은 선임 노동자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3주 동안 네 번이나 화상 치료를 받았지만 산재 보상을 받지 못했다. 2011년 기아자동차 광주 공장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 김 군은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다.


이민호 군은 제주지역 생수 공장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중 적재 프레스에 몸이 끼어 사망했다. 그는 감독자는커녕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일을 하다가 기계 고장으로 사망했다. 기계의 오작동으로 이미 두 번이나 부상을 입었지만 업체는 설비를 고쳐주지 않았다. 2017년 8월, 이민호 군이 친구에게 보낸 카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 회사 상황. 원래 있던 베테랑들이 우리 같은 초보한테 1주일 미만으로 알려주고 퇴사함. (8월 5일)
아직 고딩인데 메인 기계 만지는 것도 극혐인데 기계 고장 나면 내가 수리해야 됨. ㅂㄷㅂㄷ. 야근은 덤이고, 작업장 실내온도 진짜 실환가 싶을 정도로 개힘듦. (8월 6일) (159쪽)


전국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위원장 이은아는 말한다. 학교에서 노동인권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준비된 영상물을 틀어 놓고, 영상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것을 체크할 뿐이다. 현장실습 중 문제가 생겨도, 상담할 창구가 없다. 특성화고는 기계 장비 등 돈 드는 곳이 많아 정부 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데, 지원을 받으려면 취업률을 높여야 한다. 학생들이 실습현장을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직업교육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힘들어도 그냥 견뎌라" 하시죠. 그게 사회생활이고, 버티면 거기 직원이 돼서 계속 돈을 버는데 당장 포기해버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며. (272쪽)


현장실습이란 제도가 악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또한 문제다. 나쁜 노동조건은 청소년 노동자뿐 아니라 성인 노동자에게도 나쁘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나쁜 노동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청소년이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한다. 그러나 위험한 작업 환경과 청소년을 분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청소년은 일자리를 얻지 못할 뿐이다.


죽은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모임을 만들어 서로를 위로하며 지낸다고 한다. 세상은 아이들의 죽음을 쉽게 잊는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말한 것처럼, '남의 일이니까' 잊어버리는 거다. 그러나 지금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언제까지나 나와 상관 없는 일로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독일인 절대다수에게 나치의 차별 정책은 아주 오랫동안 '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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