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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30. 2021

"3주 완성" 시험에 잘 나오는
화두 48제 풀이집

[책을 읽고]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강신주


불립문자. 선종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4자 성어다. 선종은 순식간에 날아드는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화두가 중요하다. 화두를 정리한 책은 예전부터 있어왔으나, 1228년 드디어 스테디셀러가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무문관>이다. 48개의 핵심 화두를 정리한 것이다.


영화<달콤한 인생>으로 유명해진, 흔들리는 것은 과연 바람인가 나무인가 하는 화두도, 유명한 '뜰 앞의 잣나무'도, 그리고 머리 위에 신발을 얹고 바깥으로 나갔다는 조주의 일화도 <무문관>에 등장한다. 아쉽게도, 내가 들어본 화두는 이 셋이 전부다.


화두는 화두다. 해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이 해설도 없이 화두를 음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설을 찾아 헤맨다. <철학 vs 철학>으로 알게 된 강신주는 이 책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다. 인문학 토론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이라는 말이다. 굳이 헤겔식 변증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문학적 통찰은 현상의 여러 측면을 관찰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측면을 나열하는 식의 명제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외면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런 불명확함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강신주는 다르다. 그가 직접 <강신주의 다상담>에서 밝혔듯이, 그는 A라고 볼 수도 있고 B라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답을 던진다.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위험이 매우 농후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철학 vs 철학>과 같은 책을 낼 수 있을까? 플라톤도 버클리도 칸트도 자기모순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다름아닌 전기 비트겐슈타인, 즉 오만방자했던 젊은 시절 자신을 비판하며 철학의 무대에 등장했다. 어떤 철학자 한 사람을 집중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도식화는 필요하다. 그래야만 철학사라는 거대한 그림 위에서 그 철학자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강신주의 <무문관> 해설 역시 도식적이라고 볼 여지가 아주 많다. 불립문자인 선종의 화두를 문자로 표현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금강경>을 오쇼 라즈니쉬의 해설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도 <금강경>을 그냥 아름답지만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 그런 '문학작품'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지몽매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해설은 필요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내공을 쌓고 나면, 언젠가는 스스로 그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볼 엄두도 나지 않을까.



1. 비풍비번


<무문관>에서는 29번째로 등장하는 화두지만, 이 책에서는 첫 번째로 등장한다. 워낙 유명한 화두라서 그럴 것이다. 이 화두를 가장 직관적으로 바라보면, 혜능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끝나게 된다. 즉, 흔들리는 것은 나무도 바람도 아니고 관찰자의 마음이다. 버클리가 상기되는 대목이다. 관찰자가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화두를 먼저 읽고 나서 생각을 조금 해본 다음에 해설을 읽었다. 그래서 이 유명한 화두를 읽고 나서는 이렇게 썼다.


나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도구적이다. 나도 사실은 실재를 믿는다. 따라서 솔직한 대답은 바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버클리의 논리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신이라는 편리한 방편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그의 질문은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나는 나무가 쓰러질 때 그 어떤 관찰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가 실제로 쓰러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질문이 유아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관찰자 없이 실재가 없다고 믿는다면, 나 이외의 모든 지각체는 아마 그럴싸하게 겉모습을 흉내내는 로봇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타인이라는 지각체에 부여하는 실존성을 숲속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에게도 부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음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일 것이다. 불교를 절대적 관념론이라 치부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는 혜능의 대답은 정답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문관>의 저자인  무문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무문관>, 책 23쪽에서 재인용)


포인트는 물론, 마음조차 아니라는 무문의 지적이다. 요는 마음의 지향성에 관한 문제다. 바람이나 깃발에 관한 마음의 지향성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 둘이 모두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할 때, 바로 그 명제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실체를 들어 바람과 깃발을 대체하려고 한다면 이 또한 마음의 지향성에 갇힌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무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법을 이룬 아라한이 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과도 궤를 같이한다.



2. 해중조거


월암 화상이  어느 스님에게 물었다. "해중은 100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었지만, 두 바퀴를 들어내고 축을 떼어 버렸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무문관>, 책 124쪽에서 재인용)


'해중조거'라는 제목이 붙은 무문관의 제8칙이다. 싯다르타는 인간이 오온, 즉 다섯 개의 덩어리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것들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각각 육체, 감각, 표상, 의지, 그리고 판단이다. 싯다르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다섯 가지 작용이 얽혀 자아라는 환상을 만들 뿐, 자아라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해중이라는 기술자가 했던 일이 이와 같다. 100개의 바퀴살과 중심축, 그리고 테두리로 바퀴를 만들었으나, 이를 분해하면 각각의 부품만이 남는다. '바퀴'라는 실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강신주는 현악4중주라는 비유로 자아를 설명한다. 현악4중주가 연주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떤 음악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 넷이 우연히 조화를 이룬 것뿐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지적하듯,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별들의 폭발을 거쳐, 우리 태양계로 들어와 많은 생물과 무생물을 거쳐 내게 이르렀다. 그들이 지금은 나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지만, 내 죽음 이후에는 또 다른 실체를 구성하기 위해 이합집산할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우리의 영혼이 죽음 이후 대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우리는 잠깐 지구라는 별로 여행을 온 여행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실체는 우리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의 일시적인 조화에 불과하다.



3. 동산삼근


어느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동산 스님이 말했다. "마 삼근이다." (<무문관>, 책 334쪽에서 재인용)


무문관 제21칙, '운문시궐'에서 운문 스님은 같은 질문에 "마른 똥 막대기"라 대답했다. 이에 대해 강신주는 말한다. 운문 스님이 지적한 것은 부처에 대한 집착과 숭배를 경계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부처를 향해 절을 한다. 이 절의 의미가 여호와나 알라에 대한 절과 같은 것이라면, 그들은 싯다르타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사실, 젊은 시절의 강신주도 잠시 착각을 한 듯하다.


당시 패기만만했던 저는 어느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불상에게 경배한다면, 불교가 어떻게 기독교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미소를 띠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불상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모습이니, 경배한다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122쪽)


불교에서 말하는 삼귀의에는 불경과 스님에 대한 귀의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것이 은근히 불편했는데, 언젠가부터 이해하게 되었다. 불경과 스님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단지 예의일 뿐이다. 가르침을 주는 대상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뿐이지, 불경과 스님에 대한 맹목적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문관> 제18칙에서 동산 스님은 말한다. 부처는 마 3근이라고. 이에 대해 현학적 해석이 이어졌다. 마 3근이라면 스님의 승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고, 질문을 받을 당시에 동산 스님이 마를 다듬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답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 강신주의 입장이다.


유명한 단하 스님의 일화가 있다. 추운 겨울 대웅전에 방치된 스님이 목불을 쪼개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는 이야기다. 이를 보고 주지 스님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어찌 스님이라는 자가 부처를 태울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단하 스님이 대답했다.


"사리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노발대발하던 주지 스님은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답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목불이라는 허상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무 토막은 부처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나무다. 마 3근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라는 것이 강신주의 해석이다. 목불을 땔나무로 볼 수 있듯, 승복도 '마 3근'이라 볼 수 있어야 집착에서 벗어난 사유라는 것이다.


'마 3근'은 과연 '마른 똥 막대기'보다 어려운 화두다. 강신주의 해설이 그렇게 와닿지는 않지만, 이 어려운 화두를 그 정도로라도 풀어준 것이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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