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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04. 2021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할 때

[책을 읽고] 사상 최강의 철학 입문 / 야무차



'철학 입문'은 대강 써서 책 내기 좋은 소재다. 역사에 뛰어난 철학자는 차고 넘치며, 이들을 도식적으로 엮어 얄팍한 지식을 드러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철학사조라는 큰 그림에 잘 꿰어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고, 그들의 사상도 아주 얕은 수준에서만 조감된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자들을 관통하는 주제를 잘 선택해서 훌륭한 내러티브를 이끌어낸다.


가장 내러티브가 탄탄한 것은 '진리'에 관한 제1부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했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시작, 왜 진리를 찾아야 하는지 설파한 소크라테스를 거쳐, 데카르트, 흄, 칸트로 이어지는 근대철학 3인방, 그리고 변증법의 헤겔까지 나아간다.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가 여기 왜 끼어 있는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레비스트로스와 듀이를 간략히 살펴본 후, 저자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에 이르러 진리에 관한 논의를 마친다. 진리에 관한 논의에 데리다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레비나스의 '타자' 논의를 진리에 관한 탐구의 마지막 장으로 택한 것은 꽤 인상적이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생각을 반영한 선택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시껄렁한 제2부와 제3부를 지나, '존재'에 관한 제4부가 펼쳐진다. 나는 철학의 최대 숙제가 인식론이라 생각하는데, 저자는 존재에 관한 제4부에 바로 그 인식론을 포함시킨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식론의 총아는 다름 아닌 데카르트, 흄, 칸트의 3인방이다. 저자는 이들을 이미 1부에서 다루었으며, 진리에 관한 논의에 인식론이 빠지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진리'의 내러티브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생략하기는 했지만 그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두 사람, 즉 버클리와 후설을 제4부에 배치한다. 하이데거 역시 근본적으로는 후설의 제자로 인식론과 관련이 깊지만, '존재'라는 주제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니 제4부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4부의 전개에서 특기하고 싶은 것은 저자가 뉴턴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뉴턴은 물론 철학자로 볼 수 있고, 뉴턴이 존재론과 인식론에 가져온 엄청난 충격은 당연히 그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의 배치가 훌륭한 점은 뉴턴 직후에 버클리가 온다는 점, 그래서 버클리의 대단히 현대적인 철학이 사실은 엄청 옛날에 나타난 철학 사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 점이라고 하겠다.


내러티브의 훌륭함을 얘기했지만, 이 책의 백미는 책을 마무리짓는 맨 마지막 장에 있다. 소쉬르를 다루는 이 장에서, 그는 존재와 인식에 관해 꽤 세밀한 논의를 펼친다. 유럽 사람들은 흰 토끼와 갈색 토끼를 구별하지만, 동양 사람들의 언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권 국가들은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만 프랑스어에서 둘은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 유럽어에서 여동생과 누나가 같은 단어인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단어가 표현하려는 차이가 그 언어의 사용자들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차이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우주 저 멀리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지성을 지닌 기이한 무언가가 우리를 찾아왔다고 하자. 하늘을 덮는 거대하고 기이한 괴물이 무서운 눈으로 구름 사이를 쳐다본다는 설정이다. 과연 그 괴물은 우리를 인간으로 바라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괴물은 인간을 봐도 단순한 원자 결정이 굴러가고 있을 뿐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359쪽)


이 괴물의 눈에는 인간과 토끼, 더 나아가 돌이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수많은 눈 결정을 서로 구별하지 않고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서로 포개고 겹쳐서 단단히 다지는 것처럼, 괴물은 인간과 토끼, 그리고 돌덩이를 모아 한덩이로 뭉쳐 으깨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플랫랜드>에서 2차원의 존재인 주인공은 3차원을 처음 대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3차원의 구체가 그를 들어올리기 전까지, 그는 3차원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믿지를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주 어딘가에 사는 외계인이 우리를 보며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계가 3차원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고 멍청한 상상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이다.


버클리와 소쉬르를 논하면서, 저자는 마치 '생물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상에 인간이 싸그리 사라져버린다면, '사과'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나아가, 사과라든가 세계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근원적으로 진리를 갈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생명이 존재하지 않던 138억 년 전의 우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태양이 수명을 다하고 인류도 존재하지 않을 먼 미래에 양성자 붕괴가 과연 일어날지 궁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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