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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05. 2021

흥부 이야기, 내게는 여전히 로또로 보이지만...

[책을 읽고]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금강경>을 나는 군대 시절에 만났다. 국방일보와 국방 홍보만화를 제외하면, 내무반에 있는 읽을거리는 성경과 금강경뿐이었다. 성경은 외울 정도로 읽었으니, 금강경을 한번 펼쳐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면서도, 그 짧은 경전을 읽고 또 읽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금강경> 해설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다음이다. 미니멀리즘의 실천 차원에서 나는 종이책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는다. 아끼던 책들을 모두 처분하고, 지인들에게 선물했지만, 5권 남짓의 책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오쇼 라즈니쉬의 <금강경> 해설이다. 몇 년마다 한번씩 펼쳐보는 바람에, 지금은 꽤 너덜너덜해져 있다. 오쇼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금강경은 아직도 그저 아름다운 싯귀 모음 정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금강경의 도입부는 이렇다.


이와 같음을 내가 들었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금강경 제일, '법회인유분'.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23쪽에서 재인용)


오쇼의 번역이 조금 더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다. 나와 같은 범인에게 이 구절은 그냥 인트로 내지 배경 설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쇼나 법륜 스님은 이 장면에서 싯다르타의 '마음챙김'을 본다. 가사를 입으시고, 공양을 드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시는 것 모두에서, 부처님은 그 몸가짐과 하나가 되신다.


법륜 스님은 이렇게 해설한다.


금강경의 가르침, 더 나아가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한 장면에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최고의 도가 있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계십니다. 1분에서 이 의미를 깨달으면 나머지 뒷부분은 보충 설명에 불과합니다. (38쪽)


언틋 뭔가를 본 것 같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보충 설명이 필요한 쪽에 속한다. 그래서 이 책의 나머지도 즐겁게 읽었다. 법륜 스님은 중간 중간에 '지금까지의 요약'을 배치했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을 놓치지 않고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이 어떤 경전인가? 모순으로 점철된 듯한 문장이 이어지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으 표현을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경전이다.


금강경이 가장 강조하는 포인트 중 하나는 아마도 무주상보시의 공덕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무주상보시, 즉 보시를 행한다는 마음 없이 행한 보시가 최고의 보시라는 것이다. 예컨대 흥부는 제비 다리 다친 것을 고쳐주고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다. 우리처럼 몽매한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선행이 로또 당첨을 가져온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법륜 스님은 말한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비록 작은 행위일지라도 바라는 마음 없이 베푸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교훈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화는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인데, 흥부의 이야기는 본말이 전도될 정도로 지엽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부처님께 등불 하나를 보시한 여인의 일화를 들면 될 일이다. 제비 다리를 고쳐준 흥부가 받은 복은 깨달음이나 열반이 아니고, 금은보화였다. 이쯤 되면, 스토리를 짠 사람의 잘못 아닐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통해 노자를 알게 된 후, '구별을 짓지 않는 철학'의 심오함에 감탄해 왔다. 그래서 <도덕경>을 읽었으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었고, <금강경>을 읽었다. 뭔가가 언틋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간 듯하다가도, 다음 순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진정 황홀할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한 조각이라도 느끼는 순간에는 머릿속에 번개라도 치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법륜 스님은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캄캄한 방 안이 밝아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 방이 백 년 전부터 어두웠든 어제부터 어두웠든 불빛 하나 밝히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원리입니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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