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강신주, <철학 vs 철학> (1)
본질은 존재하는가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인 본질에 관한 논쟁이 <철학 vs 철학>이라는 책의 서장을 연다. 본질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누가 책상에 기대 앉은 채로 이야기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을 불편하게 바라보던 한 사람이 드디어 말한다. 책상은 책을 올려 놓고 보는 신성한 물건인데, 왜 거기에 걸터앉아 있느냐고.
본질의 문제를 가장 시원하게 다루는 사상은 다름 아닌 불교철학이다. <신경 쓰지 않는 연습>의 저자이자 승려인 나토리 호겐은 말한다.
제법무아다. 고유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은 없다는 진리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읽고 있는 이 책도 고유의 실체는 아니다. 책장에 넣어두면 컬렉션이 되고, 쌓아두면 받침대가 된다. 한 페이지씩 찢어서 불에 태우면 불씨가 되기도 한다. 염소에게는 먹이가 되고, 버리면 쓰레기가 된다. 던지면 무기가 된다. 서적 던지기 대회가 있다면 경기용품도 될 수 있다. (나토리 호겐, <신경 쓰지 않는 연습>, 126쪽)
명쾌하지 않은가? 불교를 제대로 배운 사람에게 본질이란 이렇게 명쾌한 개념이다. 그런 건 없다.
추운데 어쩌라고
단하 스님이 목불을 태웠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어느 사찰에 들른 단하는 날씨가 추워 목불상을 태우기 시작했다. 주지가 헐레벌떡 뛰어와 뭐 하는 짓이냐고 힐난한다. 그러자 단하는 대답한다.
"사리를 찾아보려고요."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냐고 반문하려던 주지는 순간 깨닫는다. 자신이야말로 불상의 본질을 착각한 것이다. 나토리 호겐이 위의 책에서 말하듯, 이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제법무아'다. 그에 따르면 불교에는 워낙 다양한 종파들이 있어 뭉뚱그려 말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세 가지 가르침을 공유해야 비로소 불교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삼법인이라 부르는데, 제행무상, 제법무아, 그리고 열반적정이다.
본질에 대한 집착은 주객전도로 이어진다
부처님은 인간을 오온이라 설명했다. 즉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데, 육체, 감각, 표상, 의지, 그리고 판단이 그것들이다. 이들이 합쳐지면 인간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오온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가 소멸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이는 48개의 화두를 정리한 책, <무문관>에 '해중조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부분은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전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본질이란 우리의 관점에 의해 재해석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덧없는 것을 절대화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주의라는 함정에 빠진다.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라는 한심한 책에서, 저자 로저 스크러튼은 보수란 '우리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언틋 듣기에 꽤 괜찮은 이야기로 들린다. 과연 그런가? 한번 살펴볼 일이다.
정직이란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칸트도 정언명령의 사례로 정직함을 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직접 든 사례에서 칸트는 친구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 상황에서조차 정직이라는 정언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칸트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한심한 도그마에 빠진 '식자'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정언명령 중 끝판왕은 바로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례에서 칸트는 정직이라는 한갓 추상명사를 위해 친구를 희생시킨다. 친구의 안위는 정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해 희생된다. 이 사례가 사람을 한갓 수단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칸트는 그저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장이 영감일 뿐이다.
로저 스크러튼은 위의 책에서 오래된 교회 건물 같은 것을 '지켜야 할 가치'의 사례로 들고 있다. 과연 보수꼴통답다. 그가 오래된 교회 건물을 지키려는 것은 그 건물을 부수고 '복지 센터'가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투자은행 같은 것이 들어설 예정이었다면 그는 교회 건물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가치를 대변하는 건물, 즉 복지 센터가 들어설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그에게 오래된 교회는 어떤 본질로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절대화되어 그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데아가 된다.
본질에 대한 집착 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단하 스님이 목불을 태운 고사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