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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책을 읽고] 강신주, <철학 vs 철학> (4)

by 히말

고유명사는 자체적으로 의미를 가질까


고유명사는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외연과 내포가 무작위적 결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국어를 한 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고유명사, 예컨대 어떤 이름이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순히 즉흥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합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법원이 아니라 법원 할아버지가 와도 개명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고유명사는 단지 어떤 실체를 지칭할 뿐, 아무런 내포를 가지지 않는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프레게라는 철학자는 고유명사에도 내포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예컨대 금성은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녁별과 새벽별이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이 두 별이 다른 별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지만, 프레게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녁별과 새벽별이라는 두 고유명사는 동일한 하나의 실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외연이 같다. 그러나 내포가 다르다. 하나는 '저녁에 보이는'이라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벽에 보이는'이라는 내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비가 온 다음에 비가 올줄 알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관청의 설명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즉, 사후적 설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버트란드 러셀은 고유명사가 내포를 가진다는 프레게의 주장을 확장시켰다.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는 '플라톤의 스승'이라는 내포를 가진다. 러셀의 이런 입장을 '고유명사의 기술적(descriptive) 정의라고 부른다.



크립키의 반격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사물에 고유명사가 부여되는 처음 순간에 주목한다. 최초에 누군가 어떤 실체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 다른 사람은 같은 실체를 지칭할 때 그 이름을 빌려쓰게 된다. (어쭙잖은 번역자들이 이런 관행을 거부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이어받아 대철학자 러셀에게 반기를 든 것이 크립키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에 '플라톤의 스승'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던 사람이 우연히도 플라톤이라는 사람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언어란 무엇이든 기술할 수 있으므로, 어떤 가상의 세계, 예컨대 마블코믹스에서 매번 등장하는 지구-783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제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크립키는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대체역사소설을 쓴다고 하자. 소설 속의 세계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공격하여 재판에 세우는 사람들의 하나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가능 세계'에서든 변하지 않고, 즉 고정적으로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가 품는 내포란 있을 수 없다.


강신주의 강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그는 가능 세계라는 개념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미래시제를 사용한다. 누군가가 '강신주는 편의점 주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문장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틀린 문장이다. 그러나 강신주가 미래에 편의점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강신주라는 고유명사가 '편의점 주인'이라는 내포를 가졌는지 아닌지는 확정될 수 없다.


철학의 많은 문제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고유명사의 내포에 관한 이 논쟁만큼은 결론이 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대로 크립키는 역겨운 인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라이프니츠와 프레게를 거쳐 러셀이 세우려고 했던 고유명사의 기술적 정의를 완벽하게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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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거 알아서 뭐 하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을 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원래의 세계에서 서로를 찾기 위함이다. 이는 고유명사가 본질적인 임의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떤 실체와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든 예시에서도 말했듯이, 이름 따위 알아봤자 개명이라도 해버리면 아무 쓸모 없어진다. (물론 그 사람의 '이력'으로서의 의미도 있고, 옛 이름으로 누군가를 찾아낼 수도 있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고유명사의 임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몸이 바뀌는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음에도 서로의 이름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이름과 실체의 결합은 임의적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이름 따위에서 알 수 있는 것보다 상대의 실체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하게 알고 있다. 이름 따위를 궁금해할 이유가 없다.


이름이 필요해지는 시점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다. 단지 임의적 결합일 뿐이지만, 그에게 그녀를 찾아낼 단서는 그것뿐이니까.


그러나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크립키가 보여준 대로, 이름은 절대 '고정된' 대상을 가리키지 못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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