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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어벤저스 동양 지부

[책을 읽고] 강신주, <철학 vs 철학> (5)

by 히말

화장실에서 본 명언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예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한다. - 공자"


헉. 공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럼 유교는 공자를 배신한 학문이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나는 머지않아 강신주에게서 듣게 된다. 그의 해설은 이렇다. 공자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노예나 여자는 물론 무산자들도 배제한, 말하자면 사회 주류 집단의 구성원들만을 의미한다. 즉, 공자가 예를 차려야 하는 대상은 귀족 남자에 국한된다. 이것이 공자 철학의 핵심, '서'다.



1. 노자의 파시즘


이미 책의 전반부, 즉 서양철학 파트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이지만, 강신주는 계속하여 노자와 장자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그 대립각이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립구도다. 강신주의 도식적 철학 체계는 분명 방대한 철학사를 아우르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미시적 차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다. 이렇게 되면 철학하기, 즉 철학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아무튼, 강신주에게 노자는 본질을 지향하는 경직적인 철학자인 반면, 장자는 유연한 사고를 물 흐르듯 사용하는 자유로운 철학자다.


아직도 <노자>를 정치와는 무관한 형이상학적 책으로 읽으려는 사람이 많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하이데거를 정치와 무관한 철학자로 독해하려는 사람도 많다. 순수한 철학이 가능하다는 생각, 그것은 순수문학이란 생각만큼이나 음험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음험한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단순한 지성만이 할 수 있다. (중략) 잊지 말자! 도든 존재든 일자를 중시하는 사유는 정치적으로 군주제나 파시즘과 공명하게 된다는 것을. (1255쪽)

강신주는 이 책 초입에서 말했다. 본질에 대한 사수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본질이라 부르고 절대화하는 순간, 이는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도구가 된다. '무명'을 '유명'에 대해 우월한 것으로 규정한 노자, 그리고 <존재와 시간>의 결론을 피와 조국에서 찾는 하이데거 모두 결국에는 보수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시절 학생들에게 나치즘을 주입하려고 이런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독일 민족은 지금 영도자(Fuhrer)로부터 투표하라고 소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도자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그분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모든 것을 가장 탁월하게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전체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으로서 현존(Dasein)을 원하는지 아니면 전체 우리 민족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입니다." (<프라이부르크 학생신문>, 강신주의 책 728쪽에서 재인용)

우연찮게도, 노자나 하이데거 모두 내게는 '철학자 어벤저스'의 구성원들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를 다섯, 아니, 셋만 꼽으라고 해도 저 둘은 들어간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노자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책을 한 권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점뿐일 것이다. 대만의 인문학자 양자오는 장자가 노자보다 전 시대 사람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노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책 한 권만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고 해도, 이것저것 다양한 부분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노자 철학을 파시스트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연 충격적이다. 파괴력이 있다. 그가 내세우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나는 납득하지 않는다. 노자만큼 절대주의를 배격한 철학자가 또 있었던가? 절대주의를 배격하는 것을 파시즘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2. 아나키스트의 원조, 양주


맹자의 서술에 따르면,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것은 묵적과 양주라는 두 철학자다. 묵적은 양자오의 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양주에 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맹자에 따르면 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털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양주의 주장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맹자의 평을 하나 더 들어보자.


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것은 군주를 없애는 것이고, 묵적은 두루 사랑하니 이것은 부모를 없애는 것이다. (<맹자>, <등문공> 하편, 강신주의 책 1363쪽에서 재인용)

맹자는 과연 예리하다. 양주의 주장이 결국 군주제를 배제하려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다. 이는 <열자>의 <양주> 편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백성 자고는 한 개의 터럭으로서도 남을 이롭게 하지 않았고, 나라를 버리고 숨어서 밭을 갈았다. 우임금은 한 몸을 가지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않았고 그의 몸을 지치고 깡마르도록 만들었다. 옛날 사람들은 한 개의 터럭을 뽑음으로써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여도 뽑아주지 않았고, 천하를 다 들어 자기 한 사람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받지 않았다. 사람마다 한 개의 터럭도 뽑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열자>, <양주> 편, 강신주의 책 1366쪽에서 재인용)

양주가 강신주의 마음에 든 이유를 미루어 알 만하다. 강신주는 대의제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며, 교묘한 속임수에 의한 정치적 권리의 몰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주는 바로 그런 '시스템' 자체를 배격한 것이다. 남을 위해 물길을 다스리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어째서 훌륭하다는 말인가? 모든 이들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라고 양주는 말한다.


한비자의 법가는 다름 아닌 법치를 주장했다. 법치가 무엇인가? 법으로 다스리라는 말이다. 이는 폭력과 자의에 의한 다스림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한비자는 법을 내세워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양주의 아나키즘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3. 나가르주나와 러셀


나가르주나는 중관학파의 시조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인 철학자다. 그런데 그는 언어철학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다.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상견(常見)이라 하고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만 그의 모든 작용은 우발적이라는 주장을 단견(斷見)이라 한다.


상견은 인중유과론이라고도 불리는데, 원인(주어)에 결과(술어)가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상견 명제가 중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철수가 간다'라는 명제는 철수에게 '가는 자'라는 속성이 내재함을 뜻한다. 따라서 '철수가 가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어불성설이 된다. '가는 자가 가지 않는다'라는 문장과 같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나가르주나가 단견조차도 비판한다는 점이다. 논리적 전개는 명쾌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단견 역시 불변하는 실체를 가정하므로 옳지 않다고 한다. 중관학파는 결국 모든 것이 공하며,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실체는 물론 우리 너머에 있는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단견 역시 그들에게는 '공'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조차도 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모순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이 니야야학파다. 이는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던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에피메니데스에게 '당신도 크레타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아마 에피메니데스는 헛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크레타 사람들은 거의 다 거짓말쟁이라는 거죠. 고지식하기는..."


러셀이 논증한 '자기모순 명제'는 사실 사람들이 흔히 남발하는 과장법에 다름 아니다. 자기모순 명제의 모순성을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한번 웃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가르주나는 니야야학파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만약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공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하다는 표현은 어떤 존재의 완전한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어떤 불변의 본질이 있다는 생각을 부인하는 것뿐이다. 모든 것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므로, 불변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싯다르타가 사람을 오온의 결합이라 설명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얼토당토않은 비난에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해 주는 나가르주나의 모습이 왠지 정감 간다.


Eight_Patriarchs_of_the_Shingon_Sect_of_Buddhism_Nagarjuna_Cropped.jpg 나가르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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