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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지만 따분한,
그래도 읽어야 하는

[책을 읽고] Ted Chiang 단편집

by 히말

*** 초강력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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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항성계는 프록시마 센타우리다. 문제는 이 녀석이 쌍성인 알파 센타우리와 함께 3중 항성계를 이룬다는 점이다. 지구에서 문명이 멸망하고 알파 센타우리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는다는 식의 서사가 많았지만, 알파 센타우리가 쌍성계로 알려진 시점부터는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가 급격히 줄었다. 두 개도 문제인데 세 개라니. 그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류츠신이 <삼체>라는 책을 들고 나타났다. 그곳에 사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삼체>는 대단히 따분한 클리셰로 시작하고, 난데 없이 지루한 가상 현실 게임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 혹독한 환경에 문명이 발생했고, 그들이 이제 천국과도 같은 환경의 지구라는 행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과학 수준으로 왜 다른 행성을 테라포밍할 생각을 안 했는지는... 그냥 패스하자.)


류츠신의 <삼체> 시리즈가 보여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테드 창의 책에는 십수 개가 나온다. 아름다움을 감각하지 못하는 특수한 뇌 처치, 이름을 불러 생명력을 이끌어 내는 가상의 세계, 뇌 자극으로 갑자기 천재적 능력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1=2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미쳐버린 여자 수학자...


그러나 테드 창의 단편 중 단연코 빼어난 작품은 타이틀 작품이기도 한 <네 인생의 이야기>다. 헵타포드의 문자 체계는 과연 기발하다. 빛의 경로를 설명하는 이론을 들어 헵타포드의 인식 체계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왜 테드 창의 단편이 가끔 학술지 <네이처>에 실리는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이 빼어난 작품을 다시 읽을 때 이런 부분을 빼고 읽었다. 이 이야기에서 내게 감동을 준 것은, 주인공이 딸에 대해 가지는 애틋한 감정선이다. 헵타포드와의 만남으로 시간의 개념을 초월할 수 있게 되었기에,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동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부분은 사랑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본 딸의 이야기, 바로 그것이다. 그것뿐이다.


And then there will be the times when I see you laughing. Like the time you'll be playing with the neighbor's puppy, poking your hands through the chain-link fence separating our back yards, and you'll be laughing so hard you'll start hiccuping. The puppy will run inside the neighbor's house, and your laughter will gradually subside, letting you catch your breath. Then the puppy will come back to the fence to lick your fingers again, and you'll shriek and start laughing again. It will be the most wonderful sound I could ever imagine, a sound that makes me feel like a fountain, or a wellspring. (pp102-103,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 Stories>)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주인공이 기억하는 딸의 사랑스러움은 헵타포드와 별 관련이 없다. 단지, 그것을 추억하는 방식에 변화를 준 것뿐이다.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인 시간을 무시하는 스토리 전개는 분명 탄복할 만하지만, 그것이 헵타포드와 직접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하는 전개는 흔해빠진 것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테드 창과 류츠신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류츠신은 몇 개 안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두꺼운 장편 소설을 세 권이나 썼고, 테드 창은 20쪽 남짓한 단편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꽉 채운다. 그러나 정말 환상적인 치즈 케익도 한두 입이나 맛있을 뿐이다. 테드 창의 단편은 대개 아주 따분하고 재미없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설명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류츠신의 책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결국은 테드 창과 같다. <삼체> 제3권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청신과 윈톈밍의 학창 시절 이야기이지, 그들이 우주적 공간과 천문학적 시간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땅을 몇 킬로미터나 파야 볼 수 있는 거대한 글자를 남기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메시지가 겨우 두 사람의 양심에 위안을 주기 위한 목적뿐이라면?


테드 창의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살면서 뭔가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을 빼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나지 못해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딸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는 엄마의 애틋한 감정선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드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나는 테드 창의 책을 강추한다. 하드 SF 팬이라면, 이 책은 줄을 치며 읽을 수 있는 완소템이 될 것이다. 하드 SF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네 인생의 이야기> 하나만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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