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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03. 2017

너의 청춘만 민망한 것은 아니다

[서평]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지금은 메이지대 교수이자 다작 작가로 잘 나가는 사이토 다카시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어두웠다. 스스로 '암흑의 시기'라고 부르는 약 10년간의 학부생, 대학원생 시절, 그리고 이어진 짧은 무직 시기 동안, 그는 세상에 내놓을 떳떳한 그 무엇도 없이 방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하였다고, 그 시기의 '폐관 수행'이 내공을 쌓게 하였노라고 저자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독서를 통해 고전 작가들의 멘토링을 받으면서 야망과 자립심을 키우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 겉도는 친구 사이로 남아 서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사이토 다카시의 초상은 거북하다. 누구라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저자는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제는 사회의 저명인사로서, 남 부끄럼 없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나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이토 다카시가 아직도 음침한 재야고수라면 감히 이런 책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강호를 주름잡는 정파 최고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거지꼴로 돌아다니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경멸하던 과거의 모습도 공개할 마음이 나는 거다.

근본적으로 나는 사이토 다카시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저자는 지금의 결과를 토대로 과거의 자기 모습을 합리화하는 것에 가깝다. 땅을 열심히 팠더니 석유가 나왔으니, 누구나 땅을 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저자는 땅을 파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주장을 넘어 땅을 파지 않는 사람들은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음악을 들으면 전두엽에 혈류가 흐르지 않아 뇌가 슬럼화 된다는 주장은 근래의 뇌과학이 밝혀낸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앤드류 스마트(Andrew Smart)의 <뇌의 배신(Autopilot)>을 읽어 보라. 인간과는 달리 동물들은 짝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는다니? 칼 새피나(Carl Safina)의 <말을 넘어서(Beyond Words)>에 보면 코끼리나 고래가 가족과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내용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사람, 독서가 짧은 사람들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하야시 다다오를 거론하면서, '나도 그처럼 평범한 사람을 증오한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인 글의 맥락을 모르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책에 나오는 하야시 다다오의 발췌문에서는 그런 증오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야시 다다오는 얄팍한 우정과 겉치레보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고독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는 타산지석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사이토 다카시의 커밍 아웃을 보면서, 나의 젊은 시절 모습도 너무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전인수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역설적이지만, 고독하게 자신을 절차탁마하는 순간에도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조금은 열어 두라는 충고로 받아들이면 좋을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책이 저자를 떠나면, 행간을 채우는 일은 독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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