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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22. 2021

감흥이 없는 인간

미국 여행을 처음 하게 된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그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랜드캐년도, 나이애가라 폭포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는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거대하게 움푹 패인 지형인데, 그렇게 많은 물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감흥이 없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나는 정말 그랬다.

나이애가라에 가기 전에 친구와 메신저 대화를 했다. 내가 나이애가라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말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면 그럴 것이고,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쪽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어느쪽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잘 안다. 나는 도시 여행쪽이다. 미술관과 식당이 제일 중요하며, 음악회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핀란드를 엮어서 다녀왔던 3년 전의 여행이 참 좋았다. 고흐, 렘브란트에 맛있는 커피, 게다가 조성진까지.

물을 좋아해서 그런지 나이애가라가 조금 더 낫긴 했다

예전에 미국에 살 적에, TV에 비자 광고가 가끔 나왔다. 그랜트캐년에서 아침해가 뜨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커플을 보여주며, 그 순간이야말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광고. 잘 만든 광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부부는 바로 그 그랜드캐년에 있었고, 몇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절벽에 앉아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는 위업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아침해는 정말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감수성이 매우 부족한 인간인가 보다.


아니, 잠깐. 그렇게 정의 내리기에는 아무래도 의문이 남는다. 타르티니나 라흐마니노프를 들을 때 나는 눈물은 뭐냔 말이다. 거장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날 울린 곡들에는 대중 음악이 월등히 많다.


눈물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전율이 오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하얀 거탑>의 OST로 유명한 B Rosette가 그렇다. 원곡은 도시적인 느낌의 재즈지만, 드라마 OST의 편곡은 수술실의 칼날 같은 긴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지금까지 봐온 영화 중에 최고로 치는 영화 <맨 프롬 어스>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지금도 받는다. "붓다를 만났던 그 사나이는 서쪽으로 돌아왔지."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적절한 배경음악과 함께 마치 서사시를 읊듯 오르내리는 어조가 동반되는 존 올드먼의 이야기. 그냥 전율이 흐른다.


이건 그림도 마찬가지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나 <야경> 같은 거대한 그림을 거의 아이맥스 느낌으로 만날 때의 느낌은, 말하자면 '벅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되면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너무 유명한 그림이지만, 고흐의 <까마귀와 밀밭>이 그런 그림이다. 하지만 인정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이 내게 던진 감정은 대개 전율보다는 '그리움'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마치 고향처럼,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리움. 세잔의 <자드부팽의 저수지>가 내게 그런 그리움을 던져 주었다.

결국 나는 자연의 위대함보다는 인류가 창조한 것들에 감흥을 느끼는 종류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남극보다는 피라미드를, 오로라보다는 우주여행을 목표로 돈을 모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잠깐. 예전에 남미 출장을 갔을 때, 너무 피곤해서 이과수 폭포를 포기한 적이 있다. 만약 이과수 폭포를 봤다면, 뭔가 다른 차원의 느낌을 받았을까? 이과수 폭포의 웅장함이나, 사막의 황량함, 남극의 차가움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어쩌면 꽤 성급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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