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이 책은 선사시대의 미술부터 시작하여 대략 모더니즘까지를 다룬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그림은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로 1960년 작품이다. 초판에는 싣지 못했을 그림이지만, 20세기 후반 미술사가 대단히 빈약하게 다뤄진 것은 조금 아쉽다. '조금' 아쉽다고 한 것은, 내가 이 시기 미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가라면 프랜시스 베이컨과 뱅크시 정도가 나의 한계다. (우연히 둘 다 영국인들이다. 아주 오랫동안 미술사의 변방이었던 영국 말이다.) 뱅크시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미술 외적인 부분이 있고, 베이컨보다 더 좋아하는 쟈코메티나 르네 마그리트, 앙리 루소는 20세기 전반기의 인물들이다. 반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인물들은 20세기 전후반을 가리지 않고 많다. 마르셀 뒤샹이나 피에로 만초니 같은 관종들은 물론이고,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백남준 따위의 팝아트 테러리스트들도 혐오한다. 잭슨 폴락이나 마크 로쓰코는 어느 정도 참아줄 수 있으나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을 사람 같이 그리는 화가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미술사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둘 다 좋다. 벨라스케스나 카라바조와 같은 거장들은 물론이고, 샤르뎅 류의 풍속화나 부셰르의 신화 그림도 좋아한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는 라파엘전파 화가들이나 그보다도 덜 유명한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그림도 좋아한다. (신기하게도 곰브리치는 이 책에 레이놀즈 경의 그림을 두 개나 넣었다!) 그러나 제일 좋아하는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다. 카미유 피사로를 정말 좋아하지만, 역시 빈센트가 더 좋은 것 같다. 결국 나도 세상에 흔해 빠진 반 고흐 빠돌이 중 하나일 뿐이다.
마네는 그냥 천재다. 그릴 때마다 미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작품이 튀어나온다. 미술사에 마네 수준의 천재는 벨라스케스와 미켈란젤로, 쿠르베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모네는 내가 좋아하는 풍의 그림을 참 많이 남겼지만, 실험적인 작품들도 빼어나다. 아내와의 순애보도 참 좋다. 피사로는 그림도 좋지만 사람이 너무 좋다. 피사로가 없었다면 누가 세잔 같은 인격을 상대해 줬을까? 시슬레는 물 표현이 정말 뛰어나다. 쇠라의 그림은 미술에 대해 뭣도 모르던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너무 착실하게 작업한 나머지 요절한 것이 안타깝다. 루벤스처럼 작업하면 오랫동안 좋은 그림 많이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로트렉이나 드가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지만,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최애는 역시 빈센트. 아침 일찍 반 고흐 미술관에 도착해서 곧바로 3층으로 직행, <까마귀와 밀밭>을 15분간 독대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거친 붓 터치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기억은 지금도 그리움 이상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서양미술사 최고의 천재들을 이 책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1. 벨라스케스
저자는 영국 왕실의 반다이크, 스페인 왕실의 벨라스케스라는 표현으로 이 불세출의 천재를 소개한다. (반다이크, 의문의 1승.) 벨라스케스는 무려 4점의 작품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초기작 중에서 유명한 <세비야의 물장수>다. 그는 이 그림을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토마>와 비교하고 있다. 저자는 '이 그림 앞에 한번 서 본 사람은 결코 이 그림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라고 썼다. 사실 벨라스케스의 대작들은 대개 그런 느낌을 준다.
많은 화가들이 역대 최고의 그림이라 꼽는 <시녀들>에 대해서는 이미 무수한 해설이 나와 있다. 거울 속에 작게 비친 왕과 왕비(반에이크를 연상시킨다), 사실상 주인공의 자리에 있는 화가(쿠르베를 연상시킨다), 시야를 방해하는 물건이 캔버스 좌측 1/3을 덮어버리는 과감한 구도(수많은 현대화가들을 연상시킨다), 편견 없이 그려진 왜소증의 인물 등 이 그림에 대한 찬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심플하게 한 마디로 이 역작을 묘사한다.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410쪽)
2. 에두아르 마네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나 <시녀들>이 아닌 다음에야, 곰브리치는 유명한 그림을 자기 책에 '또' 수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마네의 그림은 세 개뿐인데도 <풀밭 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 <피리부는 소년>, <폴리베르제르>, <장례식> 등등 유명한 그림은 전부 빠져 있다. <배 위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정도가 그나마 유명한 편이지만, 아무래도 이 그림은 회화사의 한 획을 그은 다른 작품들과는 아무래도 비교하기 어렵다. 마네의 그림은 하나하나가 논쟁거리였으나, 저자가 지적하듯 마네 본인은 자신이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거부했던 색채의 대가들의 위대한 전통, 즉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서 파생되었고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19세기 고야에까지 이르는 위대한 전통 속에서 충실히 영감을 찾아내었다. (514쪽)
내가 마네의 그림에서 생경함과 함께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곰브리치가 지적하는 대로 그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그리고 아마도 카라바조)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구스타브 쿠르베
내가 전쟁을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류의 유산마저도 그 무식한 폭력에 희생되기 때문이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파괴를 당했다. <세상의 기원>, <오르낭의 매장>, <자화상>, <화가의 작업실> 등 셀 수 없는 그의 명작 들 중 곰브리치는 딱 하나만을 이 책에 실었는데, 다행히도 나름 유명한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다.
서양미술사의 천재들 중에는 카라바조와 같은 살인자도, (천재급은 아니지만) 앙리 루소와 같은 사기꾼도, (역시 천재는 아니지만) 달리와 같은 '자칭 천재'이자 관종인 개그맨도 있지만, 대개는 세잔이나 고흐처럼 그냥 괴퍅한 성격이 제일 흔하다. 쿠르베 정도라면 천재성에 비해 괴퍅한 정도는 아주 마일드한 것 아닐까. 마네와 마찬가지로, 쿠르베도 붓질을 할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미술을 창조해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개성과 방식은 카라바조와 유사했다. (508쪽)
이렇게 세 천재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니, 공통점이 하나 드러난다. 벨라스케스의 화법은 카라바조로부터 직접 영향 받았고, 마네는 그 벨라스케스의 화풍을 발전시켰으며, 쿠르베는 비록 화풍은 조금 달라도 카라바조와 같은 생각으로 자연을 대했다. 캔사스 시티에서 카라바조의 거대한 그림 앞에 섰을 때가 기억난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드러난 한 사나이의 모습. 그것은 뭉크의 자화상과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화가가 스스로를 드러낼 때 일어나는 한줄기 빛 아닐까.